양손으로 스탠딩 마이크를 쥐고 노래를 부르는 네 모습은 그게 마치 네게 남은 마지막 생명줄인듯, 간절하고 위태로워 보였다. 십 오년, 김지원은 길고 긴 세월을 오로지 노래에만 치중해 살아왔다. 이 길이 아니면 갈 곳이 없어. 쓸쓸하게 초점 없는 눈으로 전한 이야기가 거짓이 아님을 알기에 나는 소리없이 그의 눈가를 닦아줬다. 김지원이 말했다. 그냥 포기하면 편할까. 포기하면 이렇게 고생할 필요도 없고 너도 나도 행복하게... 다급한 손길로 김한빈이 김지원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화가 난 듯, 거친 억양으로 말을 내뱉었다. 너 포기 같은 소리하지마. 너는 포기가 얼마나 힘든지 모르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벅차오르는 감정을 참으려는듯 김한빈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내 이름을 기억해줘
written by: 외삼촌


흐억!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지원이 잠에서 깨어난다. 선선한 바람이 콧잔등을 간지럽히고 밤에만 들리는 새소리가 귀에 거슬리지 않게 들려오는 작고 하얀 방. 지금 이 장소가 자기가 잠든 장소가 아니라는 것쯤은 지원은 금방 알 수 있었다. 나 왜 여기지. 내가 어제 무슨 짓을 한거지. '왜 이 곳에 있는가'가 지원의 상황에서는 가장 첫번째로 드는 생각이겠지만, 어쩐일인지 그의 머릿속에는 다른 생각으로 그득했다. 자신이 왜 이 곳에 있는지가 아닌 어디 사는 씨발놈이 이 곳에 나를 가뒀는가를 떠올리는건 어찌보면 그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버릇이었다. 건조하지만 싱그러운 고요가 방안을 가득 메웠고, 지원은 어쩌면 톡 톡 시계초침 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더 없이 신비로운 아침이었다.

수 많은 이들의 꿈. 본볻이가 직접 되어주고 있는 지원은 사실 제 직업이 자기 적성에 맞는다는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따금씩 후회를 하고는 하는데, 그중 5할은 이렇게 지원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갖은 수를 쓸 때다. 이런 일이 생길때면 지원은 정말로, 옛날에 엄마 아빠랑 형이랑 수박 뜯으며 오손도손 살던 집이 그리워지고는 했다. 예시로는 가장 최근에 있었던 일을 들 수 있는데, 그건 지원의 속옷을 어떤 미친팬이 숙소에 몰래 침입해서 훔쳐간 일이다. 이 사건이 레전드로 남은 이유는 그 사람이 그 속옷을 지 집에서 혼자 킁카킁카한게 아니라 인터넷 쇼핑 부지 사이트에 싯팔 대문짝만하게 가격 제시하라는 식으로 글을 올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일 어이없었던건 소속사가 이 일을 뒤늦게 알고 인터넷을 샅샅이 뒤져 모 카페에서 그 화제의 글을 찾았을땐 이미 댓글창에는 1000만원을 외치고 있는 사람이 수두룩하게 있었다는 거다. 지원이 이 이야기를 듣고 뒷목을 잡고 쓰러졌다는건 이제 그 소속사 직원이면 거의 다 아는 사실이 되었다.

평범한 남들이 부러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왔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납치같이 거창한 일을 하는 사람이 없어 한숨 돌리고 있었을때 역시 이렇게 일이 또 터지고 말았다. 이번엔 대체 어떤 새끼가 한 짓일까. 진짜 개새끼, 나타나면 뉴스 터지는건 뒤로하고 후들겨 패줘야지 생각하며 머리맡에 있던 베개를 그 새끼다 생각하고 찢어버릴 기세로 양옆으로 잡아당기고 있었을까, 아무도 들어오지 않을 것 같았던 문을 열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 순간, 지원은 제가 제정신이 아님을 확신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아주 울상인 표정인 남자는 그 누구도 아닌 한빈이었기 때문이다.
 비아이는 눈앞에 지원을 보고도 안 믿긴다는듯한 표정이었고 지원은 어제의 한빈과 확연히 달라보이는 외관에 제가 미쳤나, 싶어 머리를 벽에 박아대고 있었다. 한빈과 저는 분명 어제까지 술을 진탕 -한빈이 마신것은 이슬톡톡이었으나 본인 기준으로는 매우 과할 정도로- 마시고 지금 여기가 제 방인지 거실인지 그도 아니면 술집인지도 모르는 상태로 대자로 뻗어서 꼬꾸라졌다. 지원의 기억은 거기까지 였다. 그런데 그러면 어떻게 지금 다른 누구도 아닌 어제 같이 횡단보도를 사다리 타듯 기어서 건넌 한빈과 이 빌어먹을 이 곳에 같이 갇힌거지?
하긴, 한 명을 이렇게 손쉽게 납치하는데 둘을 못할까. 지원은 아주 잠시 어제 헬렐레 술을 퍼마시던 자신을 원망했다. 하지만 사람 성격 어디가지 않는다고, 바로 해결방안을 찾아 한빈과 함께 이 곳을 벗어날 궁리를 하고 있었을까,
 
 
"김지원?"
 
 
얼빵한 표정으로 물어오는 비아이를 보고 지원은 또 다시 떡실신 할 뻔한 것을 느꼈다. 쟤 그러고 보니까 왜 이렇게 울먹거려? 헐. 쟤 지금 울어?? 그 어떤 상황에서도 강한 모습만 보이겠다 다짐했던 한빈이 제 앞에서 숫제 오열하는 모습까지 다다르자 지원은 사뭇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엄마.. 나 쟤 우는 거 첨 봐..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엄마까지 불러가며 비아이의 주의를 딴 곳으로 끌어보려하지만 그럴 수록 비아이는 우어엉- 하고 우렁찬 목소리로 울어댔다. 한빈이 너 목소리 참 크구나.. 아니 성대결절 있는 애가 저렇게 큰 목소리로 울어도 돼?! 살짝 핀트가 나간 생각을 하며 비아이를 넋놓고 쳐다보고 있었을까, 비아이가 한발짝 두발짝 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지원이 쥐고 있던 베게를 방어막이라도 되는양 비아이를 향해 내밀었다.
 
 
완전히 가까이 다가온 비아이가 누가봐도 심하게 떨리는 손으로 지원의 손을 어루만진다. 만지면 부셔지는 유리라도 다루듯이 그렇게, 닿을 듯 말듯. 지원은 제 손을 만지작 거리는 비아이의 손이 만성수전증이 있는 제 손보다 두 세 배는 더 떨고 있는걸 보고 설마 나 깨어나기 전에 뭔 일 이라도 있었나 했지만 그것 뿐, 할 수 있는건 없었다. 비아이가 말했다.
 
 
"씨발... 머리 깨질 것 같아.."
 
 
그리고 철퍼덕. 지원은 죽은 사람처럼 맥 없이 뻗은 비아이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아까 대자로 누웠을 정도로 큰 침대라 해도 고작 싱글 침대에서 둘이 누워있는건 무리였는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만 같다. 사실 위태롭게 기대 있는 비아이가 걱정되서라기 보다는 제가 깔려 죽을까봐 무서운거다. 겹쳐진 몸을 겨우 빼내고 지원은 비아이를 제대로 침대에 눕힌 다음 무거운 몸을 이끌어 침대 밖으로 빠져 나왔다. 어째 입고 있는 옷은 어젯밤 그대로인데, 특이하게 양말 한 쪽이 없었다. 지원은 어쩔 수 없이 맨 발을 찬 바닥과 마주했고 갑자기 몸에 스며드는 한기에 그는 졸라 차갑네라고 작게 속삭였다.
 
 
그건 그렇고, 진짜 어떻게 된거지. 지원은 한 손으로 비아이에게 제가 덮고 있던 이불을 덮어주는 동시에 주변을 둘러보며 시계나 달력이 있나 살펴보았다. 처음에 들었던 납치라는 생각도 이제는 희미해져가고 일단 자고있는 한빈이 깨기 전에 무슨 조취를 취해보자는 생각에 발을 옮겨 컴퓨터나 휴대폰을 찾았다. 지원이 앞에 의자를 뒤로 빼고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아까부터 생각한거긴 하지만 집에 있는 가구들이 전체적으로 저가의 상품만 모아둔것 같은게 집주인이 돈이 없다는걸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어째 다 쿠팡 최저가들만 모아둔 것 같냐. 지원이 켜지려면 앞으로도 한참이 남은듯한 컴퓨터의 화면을 신경질적으로 바라본다. 그러자 아직 검은 화면 너머로 뒤에 있는 비아이가 비쳐 보였다. 그 순간, 지원은 어렴풋이 확신할 수 있었다. 저기에 누워있는건 그가 아는 그 김한빈이 아니라는걸. 일단 이따가 일어나면 캐물을것부터 생각해 놓아야겠다. 여러가지 고민이 꼬리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자 문득 한가지 생각이 지원의 머리를 스쳤다. 아까 쟤 분명 나 아는것 같았는데.
 
 
인내심이 바닥에 다다를때쯤 켜진 컴퓨터를 지원은 제 것인것 마냥 이리저리 손을 댔다. 특이하게도 컴퓨터에는 비밀번호도 하나 설정 되어 있지 않아 손쉽게 기본 배경화면인 푸른 산을 볼 수 있었다. 과연 지금이 몇 월 몇 일일까. 설마 설마 하지만 만약에 진짜로 이상한 곳에 와 버린게 아닐까 싶어 떨리는 동공을 주체하지 못하고 마우스를 식은 땀으로 적시고 있었을까,
 
 
"마음대로 남의 컴퓨터 손대고 그래도 되는거야?"
 
 
뒤에서 들려오는 비아이의 목소리에 지원은 너무나도 놀라 화면에서 급하게 날짜만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러려고 했다. 지원은 아직도 심하게 벌렁벌렁 거리는 심장을 덜덜덜 떨려오는 손을 쓰다듬었다. 5월 2일. 아까 분명 5월 2일 9시 14분 이라고 써져 있었다. 그건 그렇다치고, 진짜 아까까지는 분명 물어보고 싶은게 참 많았는데 막상 한빈을 이렇게 마주하니까 정말 입이 안 떨어진다. 그러게 아까 생각 났을때 뭐 물어볼지 자세히 생각해 놓을 걸. 사실 이 순간에도 제일 거슬리는건 비아이가 잡은 왼손이다. 아니 손은 대체 왜 잡은 거지? 언제 다가오는지도 모르게 조용히 왔으면 그냥 다시 조용히 갈 것이지 왜 사람을 이렇게 놀라게 해서.. 아.... 놀란 마음에 지원의 정상적인 사고능력이 한 층 둔감해진다.
 
 
“지원이형”
“어..?”
“형...?”
“...”
“진짜 형이야..?”
 
 
잡은 손을 놓지 않고 비아이는 지원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눈 앞에 있는 사람이 믿기지 않는건 피차일반인지 비아이는 제대로 지원의 눈을 마주보지도 못하고 계곡 허공에 말을 뿌렸다. 눈은 모니터에, 손은 계속 지원의 손을 만지작 거리며 어쩐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비아이가 말한다.

“거기는 어땠어?”
“뭐..?”
“두고 가지 말라고 한 게 누군데 나보다 먼저 가버리는게 어딨어. 아니, 아.. 나 진짜.. 형... 지원이 형...”
 
 
비아이의 눈에서 작은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영문도 모르고 그런 비이이를 멍하니 바라보던 지원은 그가 숨이 넘어가기 일보 직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팔 벌려 그를 꽉 안아주었다.
 
 
다정한 위로 보다는 숨 막히는 포옹에 가까운 지원의 위로를 온몸으로 받으며 비아이는 마지막 눈물까지 모조리 몸에서 배출해냈다. 분명 맞닿은 가슴딱딱하기 짝이 없는데 차갑기만 했던 비아이의 세상에서 유일하게 따뜻함을 풍겼다. 일정한 박자로 토닥여주는 손이 정겹다. 얼마나 오랜 시간 기다려 온 손길인가. 비아이는 지원이 다시 제게 돌아오면서 가져온 수 많은 이름 모를 감정에 사무쳐 그렇게 그 날 오후, 매우 그리웠던 품에 안겨 한참을 울었다.

*****

비아이는 아직도 생생히 머릿속에 그릴 수 있었다. 지원과 함께했던 꿈같던 나날들. 너무 행복해서 죽어버릴지도 모르겠다 생각할 만큼 제게는 과분한 나날이었다. 크게 한숨을 쉬었다. 비아이는 제가 내쉰 한숨임에도 불구하고 질식할 것만 같았다.
지원과 처음 만난건, 초등학교 때 였을거다. 가랑비마냥 길거리에는 방금 막 데뷔한 그룹의 신곡이 젖어들어갔고, 대충 멜로디만큼은 알고 있는 노래였기에 허밍으로 따라 부르고 있었을 때,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김지원이랑 부딫혔다. 천만다행으로 내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지원의 손에 있던 노란색 곰돌이 인형이 땅바닥으로 곤두박질했다.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진 지원의 얼굴에 비아이가 시선을 어디로 둬야 할 지 몰라 일단 사과라도 해야하나 생각하고 있을 때 지원은 쏜살같이 일어나 팔을 뻗으며 말했다.
 
 
"미안."
 
 
성격도 좋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남 탓하지 않나. 내민 손을 잡지도 않고 뻔히 바라만보고 있자 머쓱해진 지원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그 손을 그대로 자기 머리에 대 긁적였다. 잡기 싫으면 말고. 그러자 비아이는 덥썩, 그 손을제 쪽으로 끌어당겨 움켜잡았다. 깜짝 놀란 지원이 비아이를 쳐다보고, 비아이는 아무렇지 않은 척 싫다고는 안했네요. 라며 손에 있는 제 손 만한 손을 자꾸만 조물거렸다. 손이 참 따뜻하네. 손에 열기가 많나. 그건가. 수족온증?

"어디 가?"
"나? 학교."
"오. 너 어디 초 다녀?"
"일산초."

"어? 나도!"
나 이번에 막 전학왔는데! 개 반갑다. 너 나 학교가면 아는척 해줄거지? 아 맞다 그리고 너 울 학교 어때? 바로 질문공격을 해오는 지원을 비아이는 뭔 이런 애가 다 있나.. 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걸 지원이 알았다면 지도 아까 손 잡고 한참 있었으면서 라 생각했을거다. 하지만 그렇게 바라보면서도 비아이는 친절하게 나도. 당연하지. 너 몇 반인데? 개 구려. 라고 하나하나 소년다움이 묻어나오는 말로 답 해주었다. 신난 지원이 여자애들 이뻐? 쌤 들 중에 이상한 쌤 있어? 라고 계속해서 물어보고, 비아이는 아니 다 오크임. 우리 담임 개 별로. 라고 쌈박하게 답한다. 어찌나 물어볼게 많았는지 쉬지 않고 물어보는 아이와 사소한 거 하나도 빼지 않고 답 해주는 아이의 말소리가 길거리를 적셨다. 비아이는 아까부터 듣고 싶지 않아도 자꾸만 들리던 노래가 아득해져 가는 것을 느꼈다. 아, 가사가 뭐였지. 이제는 기억도 잘 안난다. 사실 둘이 서 있는곳은 핸드폰 매장 앞이었기 때문에 소리가 안 들릴래야 안 들릴수 없었겠지만. 둘은 그 때 친구 사귀기 바쁜, 감정 숨기기가 어색한 나이였으니까. 횡단보도 건너서 옆을 지나가는 비아이 옆 반 여자아이가 말했다. 어! 나 이 노래 좋아해. 옆에 있는 여자아이가 대답했다.
 
 
"이거 이번에 데뷔한 그룹 노래 아니야?"
"어, 아네?"
"당연하지 얘네 울 오빠 소속사잖아. 아이콘이었나?"


******
 
 
빛이라고는 옆에 주황빛 랜턴밖에 없는 어두운 밤. 비아이와 지원이 마주 앉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반나절 전 목이 쉬어대라 울던 비아이를 토닥여주던 지원은 비아이가 울음을 다 그치고 히끅대며 현자 타임을 만끽하고 있을깨 배가 너무 고프다며 뭐라도 먹자고 징징대기 시작했다. 비아이도 시계를 올려다보고 저녁시간이 한참 지났다는걸 자각하고 나자 별로 고프지도 않았던 배가 요동 치는 것을 느낀다. 냉장고에 뭐가 있더라. 음식을 먹은 지가 한참 되어서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비아이는 발걸음을 옮겨 냉장고 앞으로 향했다. 문을 열어보니 역시 먹을 만한 것이라고는 한 달 전 쯤이 동기 윤형이가 그래도 먹고 살아야하지 않겠냐며 두고 간 냉장고를 보고 깜짝 놀라 말했다.
 
 
“너 뭐 안 먹고 살아?”
 
 
 아.. 아예 안 먹지는 않는데. 그래도 오지랖 넓은 친구 놈들이 일주일에 두 세번씩 집에 쳐 들어와서 이것저거 먹여주는 덕에 아예 금식은 못하고 있어. 형 가고 나 혼자 남았을 때 나도 콱 죽어 버리려고 했는데 어떻게 아직까지 살아있지? 나도 참 어이없다 그지.
 
 
라고 말하면 미친놈 취급 받고 쫓겨나겠지. 제 집임에도 불구하고 비아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결국 저를 바라보고 있는 너무나도 그리웠던 두 눈동자를 경악에 물들고 싶게 하고 싶지 않았던 비아이아 옆에 하얀벽을 바라보며 어물쩡거리며 대답했다.
 
 
“보통은 밖에서 사먹어.”
“아 그래? 그럼 우리 뭐 먹냐.”
“형 뭐 먹고 싶은거 있어?”
“ 나? 어.. 해산물 아니면 다 좋아. 나 해산물 못 먹거든.”
 
 
비아이는 알고 있었음에도 아..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귈때 데이트도 무조건 해산물 없는 곳이었지. 사실 해산물 따위는 없어도 좋을만큼 지원이 너무 좋아서, 나중에 혼자 남겨졌을때도 해산물 앞에만 가면 속이 뒤틀리는 듯한 기분에 변기통을 찾아야만 했다. 둘은 뭐 먹을까, 고민하다가 비아이의 아무거나 공격에 미쳐버린 지원이 당장 화분에 흙을 파먹을 기세로 뭐 먹을 거냐고 울부짖자 비아이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기 전단지 있나 좀 보고 올게.”
“엉!! 땡큐 베리 감사.”

지원의 대답에 작게 움칫한 비아이가 이내 쓰린 미소를 입에 담고 사라지자 지원은 걸려있던 미소를 흔적도 없이 지웠다. 지원은 생각했다. 쟤 방금 분명 거짓말 한거다. 보통 밖에서 사 먹는다면 바로 냉장고부터 열리가 없지. 그리고 아까 냉장고 반찬통에 붙어있던 포스트잇에서 똑똑히 봤다. 제발 좀 챙겨먹으라고 쓴 글씨체는 많이 투박했지만 여자가 아니라는 보장도 없다. 친구 사이에 저렇게 반찬까지 챙겨주나. 그것도 락앤락 통에 손수 담아서 포스트잇까지 붙이고?

매우 틀린 생각이지만 하여튼 그렇게 지원은 어찌보면 날카롭기도 하고 사실 그냥 터무늬 없은 그런 생각에 잠겨있다 곧 비아이가 뭉텅이로 가져온 전단지에 정신이 팔려 5분간 뇌를 풀가동시켜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을 찾기 위해 애썼다. 비아이는 지원이 고른 메뉴를 보고 왜 많고 많은 음식중에 하필 그거냐. 난 고기가 먹고 싶다. 며 메뉴를 바꾸자고 우겨댔다. 결국 10분 뒤, 비아이는 뽀글뽀글 끓는 라면을 가져왔다. 그렇게 열심히 고르고 결국엔 라면이냐 - 투덜대는 지원을 비아이는 돈도 없는 주제에 감사히 여기고 절 오십번 하고 먹어라 - 며 입을 싹 다물게 했다. 한참 라면을 먹던 중에 지원이 물었다.

“야 근데 한빈아. ”
“한빈? 한빈이 누구야.”

비아이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지원을 이상한 사람 보듯 쳐다봤다. 지원은 정말 너무나도 놀라서 한빈아... 너 기억상실증도 있는거야....? 라며 주먹이 나갈 만할 말을 진심으로 걱정이 듬뿍 묻은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비아이는 어이가 털리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눈 앞에 제 이름도 잘 모르는, 그런 주제에 얼굴만큼은 제 베프랑 똑같은 남자에게 툭, 툭 말을 내뱉었다.
 
 
“한빈이가 설마 나야? 나 이름 비아이인데.”
“비아이? 무슨 한국인 이름이 그래? 연예인 이순규 급인데."
“미친놈이? 나 교포라 그래!”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가지고 패드립 치고 있어 새끼가. 매우 분하다는 듯 씩씩 거리는 비아이를 보고 지원은 더 놀랐다. 아니 별 말 하지도 않았는데 쟤 왜 저래?? 누가 보면 이름 마음에 안들어서 몰래 직접 지은 이름으로 바꾼건 줄 알겠다? 아니, 내가 언제 진짜 그렇다 했냐. 그런 것 같다고 했지! 야 아파! 진심으로 찔끔 눈물이 날만큼 아파서 지원은 비아이가 집중적으로 공격하는게 분명한 배를 양 팔로 감쌌다. 진짜 미친듯이 아프다. 확신하건데, 비아이는 복싱을 배우는것이 분명하다. 누가 저렇게 말라서 뼈밖에 없는 사람이 이런 주먹을 낸다고 생각할까. 이거 진심인데, 너는 음악이 아니라 복싱을 했어야 했어, 너는. 그 말에 더 빡친 비아이가 지원의 등짝에 세상에서 가장 선명한 손바닥 지문을 남긴건 그날 라면국물이 티에 튀어, 상탈한 지원의 뒷 모습을 본 비아이만이 알았다.


다음날, 어쩐일인지 아침 일찍부터 침대에서 일어난 비아이는 아침으로 지원이 좋아하는 타코를 손수 만들었다. 그리고 지원이 깨기 전, 집에 있는 전신거울을 모조리 방안으로 치워버렸다. 아침 늦게 일어난 지원이 비아이가 만든 타코를 보고 오 웬일~ 이라고 말하며 제 쪽으로 걸어왔다. 비아이는 세상 모든 씁쓸함을 담은 듯한 눈빛으로 제가 만든 타코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뭘 이런걸 가지고...


*****


다음날 오전, 둘은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몇 분가량 길게 이어진 비아이의 설명을 조용한 자세로 경청하던 지원은 비아이가 "그리고 형이랑 밥 먹고. 자고. 끝.” 으로 긴 이야기를 마치자 내내 비아이를 바라보고 있던 눈을 떨구고 입을 열었다.

"너 이거 지어낸거 아니지."
“형은 내가 이런걸 뚝딱 지어낼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말이 안되지. 그것도 말이 안되고 네가 말한 것도 말이 안되고.”

그러니까, 좆같은 요점 정리를 해보자면, 정확히 한 달만에 내가 죽었단다. 김한빈이 있는 세상에서의 내가. 처음에 듣고 꿈인가해서 깨어나기 위해 내 뺨도 후려쳐보고 안되자 높은 건물을 찾아 당장이라도 뛰쳐 나가려는 나를 붙잡은건 다름 아닌 비아이었다. 형 지금 뛰어내리면 나도 그럴거니까 그렇게 알아. 그렇게 말하는 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는 진심이 농도깊게 녹아있어 지원은 바로 꼬리를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응... 다시 집 가자... 그니까 나 좀 놔 줘.. 그 말을 들은 비아이는 더욱 세게 지원을 죄어왔다. 비아이가 말했다. 형 그때 살림살이 아직 다 있어. 까고 안버린 종이포장지 그런것도 그대로야. 하나도 안버렸어. 형.. 형.... 비아이의 목소리가 잘게 떨려왔다. 그걸 눈치채자마자 지원은 안긴 상태 그대로 뒤돌아 비아이를 다정하게 안았다. 비아이가 아직 할 말이 남았다는듯 지원의 옷에 얼굴을 파 묻은채 계속 뭐라 중얼거리길래 지원이 말했다.
 
 
"야."
"내가 어떻게..내가 정말 어떻게 형을 이렇게..."
"울지마."
 "......"
 "제발."

 
 
 
 
 

그간 한 달동안 비아이는 총 11번 헤로인을 했다. 제 손으로 그 매끄러운 팔에 송송 구멍을 냈다. 구멍을 내지 않으면 숨이 막혀 죽어버릴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제 몸에 집어넣는건 독약이라는 아이러니.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는 진심으로 숨구멍이 필요했다. 단지 그것뿐, 아무것도 아니였다.
 
 
비아이의 주변에는 정상인이 별로 없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비아이는 정말 운이 좋았다는 거다. 얕다고는 절대 할 수 없는 인관관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괜찮은 놈이 친절하게 널부러져 있는 비아이를 신고 해줬으니까. 아, 참고로 짭새들 소굴이 아니라 병원에. 그렇게 난생 처음으로 병원에 실려간 날, 의사들이 기겁하고 가둬 놓으려고 하는걸 미친듯이 뿌리치고 비아이는 이 집, 둘이 있던 흔적이 극적으로 남아있는 집으로 도망쳤다.
 
그 날, 비아이의 폰으로 신고해준 친구한테 문자가 왔다.
'약쟁이 새끼.'
비아이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핸드폰의 전원을 껐다.

 
 
 
 

약을 굳이 집에서 하는 이유는 지원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연습실은 이제 더 이상 저가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게 되어버렸으니, 그 다음으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여기서 뒤져야지 하는 거창한 생각보다는 굳이 따지자면 귀소본능 같은 무언가였지만 어쨌든 그래도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집 만큼은 지켜야겠다 생각했을 것이다. 제게 남은 유일한 지원의 흔적. 적어도 제 손으로 망가뜨리는 불상사는 없었으면 할테니까.

물에 젖은 듯한 빛이 창가를 통해 스며 들어왔다. 집 안 곳곳에 같이 만들던 노래. 나눠쓰던 치약. 정말 모든게 한 달 전과 똑같은 자리에 널부러져 있다. 햇빛보다 서늘한 빛을 받으며 하나같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주인을 기다리는 물건들을 보면서 비아이는 조금만.. 조금만.. 말하며 애써 시선을 딴 곳으로 옮겼다. 언제나처럼 쳐들어 온 윤형이 보다못해 지원이 죽은지 정확히 1주일 뒤에 썩은내가 진동하는 설거지 하지않은 접시들을 싸그리 비닐봉지에 싸서 버린 것 빼고는 지원이 죽은 날 그대로 남아있었다. 바깥에 비밀봉지를 버리러 가는길 윤형과의 사투 -접시를 버리냐 마냐- 에서 패배하고 눈물 어린 얼굴로 노려보고 있는 비아이에게 윤형은 말했다. 야. 산 사람은 살아야지.

"지금은 정말 죽고 싶고 그러겠지만. 만약 너가 죽어서 진짜 지원이 있는 곳으로 간다 생각해봐. 너 그럼 걔한테 무슨 말 해줄건데. 내가 잘 모르긴 몰라도 지원이 걔 너 그딴식으로 찾아오면 다시 태어나도 너랑은 말 한마디 안하려 할 걸."
"그러니까 한 1년만 더 생각해보자. 그때까지는 우리 둘 다 각자 할 일 하면서 졸라 바쁘게 사는거야. 말도 안되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
"이게 김지원이 나한테 부탁한거라고 굳이 말을 해야 따르겠지 너는."
 
 
가본다. 약 빨지 말고. 병신 같은 작별인사를 끝으로 윤형이 들고 있던 비닐봉지와 함께 저멀리 사라진다. 비이이는 한참을 문앞에 서 있다가 윤형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지 않음에 윤형이 완전히 돌아간 것을 알 수 있었다. 비아이는 어이 없다는듯 피식 웃고는 생각했다. 접시 버린 댓가로 놓고 간 가방은 내가 가져야지. 그리고, 뭐? 약 빨지 말라고? 누가 누굴보고. 지는 3년차인 주제에?
 
다시 말하지만, 비아이의 주위에는 정상인이 별로 없다.




 지원의 죽음 이후 비아이는 새벽에 둘이 자던 방에서 천국으로 가는 뽕을 빨 지 언정 해가 떠 있을때 만큼은 지원이 살아 숨쉬던 날들과 다름없어 보였다. 그를 잘 모르는 지인들은 하나같이 비아이를 독하다 표현했고 비아이를 잘 아는 사람들은 정말 하루에도 수십통의 문자를 보내며 그가 하루 빨리 전문의에게 상담을 받기를 애원했다. 그마저도 전원이 꺼져있는 비아이의 폰에는 닿지도 않았지만.

*****

불이 다 꺼지고 암흑밖에 남지않은 방에서 지원은 뻗어서 자고 있는 비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까 상황을 다시 회상시키고 있었다. 또 기억나는거 하나가 그거다. 우리는 연습생 시절에 돈이 시원찮아서 나는 편의점 알바를, 비아이는 꽃집에서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는거. 근데 이걸 결론이라고 해야하나. 모르겠다. 사실 아직 혼란스러운게 너무 많아 뭐가 뭔지 정말 하나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옆에서 새근새근 들려오는 숨소리는 몇 일전에 들은 한빈의 숨소리와 너무나도 똑같아서 어딘지도 모르는 집에서 지원을 안심시키고 푹 잘 수 있게 도와주는 레돌민이 되어주었다.


*****
 
"30일."

꿈결에 누군가가 지원에게 말했다.
지원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한참 어두운 새벽이었다.

*****


"야,야,야,야,야,야“
"아... 이 형은 왜 자꾸 날 불러싸??"

내가 그렇게 좋아요? 폭팔하기 일보 직전인 비아이가 쾅쾅대는 발걸음으로 오늘만 벌써 일 곱 번째 제 이름을 부르고 있는 김지원이 영 심기에 거슬렸는지 말투가 이리저리 틱 틱 튀었다. 그런데도 지원이,
"응 많이."
이런식으로 나오면 저인간내가오늘조져버리고만다 생각했던 것도 금방 풀어져 터덜터덜 지원을 향해 걸어갔다.

"너 그러면 이제 꽃집 일 안 해?"
"그거 물어보려고 지금 화장실 청소하는 사람을 부른거야 설마?"
"아닝... 딱히 그건 아니고."
 
 
얼굴보고 싶어서 불렀찌! 저리 말하며 지원이 활짝, 개죽이 같은 미소를 지었다. 맙소사.. 비아이가 중얼거렸다. 매일 매일 느끼는 거지만 이 형은 제가 알던 김지원이랑은 확실히 다르다. 재회한 날, 등을 두드려주던 느린 박자와 해산물을 싫어한다는 사실만 빼면 완전히 다른 사람에 가깝다. 깔깔깔 웃고 있는 지원을 보며 벌써 남몰래 조증인가... 의심하던 비아이의 표정을 보고 지원은 말했다.
 
 
"근데 너는 왜 아무것도 안 물어봐?"
“나?"
"너는 나한테 궁금하고 그런거 없어? 하나도?"
 
 
없을리가 없다. 단지 제가 알게 되면 뭐가 하나라도 바뀔까봐. 지원이 죽고 겁쟁이가 된 비아이는 이제 새로운거라면 치를 떨게 된거다. 가능하면 평생 이렇게 지원이랑 이 집에서 오순도순 살고 싶다. 나중에 한 번 윤형이도 소개 시켜주고. 놀라서 뒤집어질 윤형이의 얼굴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웃음이 새어나왔다.

"아무것도. 진짜로. 그러니까 하던 곡 작업이나 마저 하슈. 난 다시 욕실 치우러 갈테니까. 아, 꽃집 일은 접었어. 다른 거 알아볼거야."
 
 
거기 사장이 워낙 돌아이라. 그렇게 뒷 말은 일부러 흐지부지하게 말하고 하던 욕실청소를 빌미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급하게 문 쪽으로 틀었을때 다시 한 번 지원의 낮은 목소리가 방을 따뜻하게 울렸다.

"그러면 내 이야기라도 들어줘."

비아이는 정말이지 울고 싶었다. 창가에서 흘러 나오는 노란빛 햇빛이 방에 한 가득 담겨 넘실 거렸다. 그건 비아이도 그리고 전에 지원도 매우 좋아하던 조명이라서 비아이의 발걸음은 앞으로 내딛을 수 없었다. 이걸 보고 처음으로 무대 위에 서고 싶어했지. 오래됐다고 꼭 가물가물 한 것만은 아니어서, 비아이는 그 때 보았던 햇빛을 다시 기억해 낼 수 있었다. 학교가 마치고 지원의 집에 놀러가던 평소와 다를 것 하나 없던 날. 비아이는 제게 쏟아지는 햇빛에 축축하지 않게 젖어들었고, 그 햇빛보다 축축한 무대 조명에 흠뻑 젖고 싶다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전혀 연관성이 없는 두 가지만 그 때는 그랬다. 꿈이 생긴 아이는 빛나는 눈동자로 말했다.
 
 
"나 가수 할래."
"나도."
"너도??"
"응."
 
 
나도. 같이 무대 위에서 노래부르고 그러자. 지원이 그렇게 말하며 눈을 똑바로 마주하자 비아이는 행복하다는듯 활짝 웃었다.
"좋아. 내가 남자 가수하면 너는 여자 가수해."
"뭐? 내가 왜 여자야?"
"넌 이름이 김지원이잖아. 난 김한빈이고. 너 남자 가수 중에 이름 김지원인 사람 봤어?"
너무나도 떳떳하게 말하는 비아이 때문에 지원이 잠시 벙쪄있다가 말했다.

"진짜 그런가..?"

지원도 어리숙한 나이였다. 지원이 대답하자 너무나도 뻔한 사실을 말한다는 듯 눈까지 게슴츠레 뜨며 말했다.
 
 
"응! 당연하지!!"
"그러면 나 치마입고 무대 올라가야 해..?"
 
 
안 되겠다. 가수는 하지 말아야지. 지원이 곰곰히 생각하며 말하자 비아이가 아차, 싶어서 얼른 정정한다. 순간 지원이 저랑 같은 꿈을 갖겠다는걸 제 발로 찰 뻔 했다.
"야 그러면 너가 최초로 남자가수 김지원이 되면 되지...지..지..지....지..........

지...지........지......야.....! 야..! 야! 들려? 야?



저기요!!!! 퍼뜩 정신이 든 비아이가 제 옆에 뽀뽀 할만큼 가깝게 붙어있는 지원을 발견한다. 그제서야 생각난 불과 일 분 전의 대화. 맞다. 우리 이야기 중이었지.. 미안해진 비아이가 아무 말 없이 지원을 바라보자 특유의 운 듯한 눈이 먹혀 들었는지 처음에는 화나 보였던 지원도 화를 풀고 다시 말을 이었다.

"아니 아까 전부터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대답이 없길래. 너 설마 그새 잤냐?"
 
 
잔 건 아니지만, 딴 생각한 거라고 솔직하게 말하면 삐질까봐 그냥 수긍했다. "응. 오늘 몇 시간 못 잤는데 형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아까부터 자꾸만 졸려. 자장가 같아." 거짓말은 애교.



"하여간 이 놈... 그래, 그럼 다시 말할게. 그니까, 음. 나는 김지원이고 나이는 불꽃청춘. 알아내려고 하면 사생활 취미로 고소하겠어. 취미는 작사작곡하고 공연 직업도 작사작곡하고 공연."
" ..."
"까지는 사실 관심도 없는 내용이지?" 들켰다는 듯, 비아이가 움찔했다.



지원이 뒤로 기지개를 쭉 피며 시원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린다. 지원의 머리카락 사이사이에서 스며들어온 햇빛이 깨져 방 안에 수 십개의 조각들이 흩뿌려졌다. 비아이는 그 순간에도 혹시 지원이 뒤로 발라당 넘어질까봐 조마조마해서 손톱을 자꾸 입 근처에 갔다 댔다 내려 놓았다 를 반복했다. 저거 의자 은근히 뒤로 잘 꺾이던데. 저래 보여도 저번에 게임하던 찬우를 차가운 맨 땅에 들이박은 전적이 있는 무시무시한 의자다. 지난 여름, 이겼다고 빽빽 소리 지르던 찬우는 상대편에게 준 고통을 그대로 받은 듯 몸부림 치다가, 씩씩대며 일어나서 의자를 축구선수 박지성처럼 뻥뻥 차댔다.
 

용케 안 부셔지고 아직 살아있네. 근 3년을 같이 지내온 의자를 보며 또 다시 달콤 하지만은 않은 추억회상을 하고 있자 지원이 큼 큼,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두 번째로 정신이 든 비아이는 그제서야 의자가 아닌 지원을 바라보았다. 진짜 딴 생각이 늘었네. 미안해... 입 밖으로는 내뱉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사과했으니 된거다. 착하지만은 않은 비아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도 내가 어떻게 여기 오게 된 건지 모르겠어서 그거에 대해선 해 줄 말이 없다. 그래도 음.. 내가 살던 곳에서 나는 래퍼였어. 그리고 전에 말한 한빈이란 애는.. 성까지 붙이면 김한빈인데, 여튼. 그러니까.. 걔는.. 내 하나뿐인, 그리고 앞으로도 하나뿐일 그런 친구야."
"....."
"너를 참 많이 닮았어. 아니, 사실 아예 빼다박은 수준이지. 그래도 어쨌든 미안했다. 이제는 너보고 한빈이라고 생각 안 해. 솔직히 처음 하루는 했거든? 근데 이제는 안 해. 너는 비아이니까."
"...."

그 이후로부터는 쭉 지원의 시덥잖은 이야기를 들어줘야만 했다. 듣다 듣다 지쳐서 이번에는 정말로 골아떨어진 비아이가 바닥에 추신수 선수의 공처럼 빠른 속도로 고개를 박으려고 하자 지원은 재빨리 왼 손으로 비아이의 머리를, 그리고 오른손으로는 제 몸을 지탱할 수 있게 땅에 팔을 꽂았다. 아슬아슬하게 비아이의 머리를 지켜낸 지원은 미소 지은 얼굴로 낮게 한숨쉬며 중얼거렸다. 졸리다면서 이제야 잠드네.


*****


한빈과 지원의 관계를 설명하자면 이랬다. 십년 가량 인생을 음악에 갈아 넣으며 같이 데뷔하기를 소망한 둘도 없는 친구. 양쪽 다 작사작곡 능력이면 말 할것도 없고 춤이면 춤, 랩이면 랩. 빠지는 곳이 없었던 둘은 초등학교 꼬꼬마 시절부터 장래희망에 랩퍼 두 글자를 적어가며 꿈에 대한 의지를 돈독히 다졌다. 어린 시절에 작지만 인심이 좋은 엔터테이먼트에 입사하고, 랩퍼 지드래곤처럼 돈방석에 앉게 될 날만을 그리던 어느날, 둘의 소속사 사장은 지원과 한빈에게 말했다. 너네 둘 중 한 명만 데뷔 할 수 있어. 그 말은, 마른 하늘에 날벼락보다도 반짝, 지원의 세상을 붕괴시켰다. 오 년 전 어느날 한빈은 지원에게 말했다. 우리 핸드폰 없애자. 지원은 그런 한빈을 미쳤니너진짜힘들면말을하지왜갑자기내새끼가지고그래 라는 말을 담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한빈이 고개를 들었다. 마법같게도, 지원은 한빈의 눈동자를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지금 얘가 진심이라는 것을. 죽어도 이 꿈만은 포기못한다며 자는 도중 에도 흐느끼던 한빈을 지원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래. 없애자. 지원이 덤덤하게, 큰 다짐을 한 듯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한빈은 한 쪽 입꼬리를 올려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마음먹으면 바로 실행에 옮겨야한다고, 곧바로 고물상을 향해 지원과 한빈은 엘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그래도 데뷔하면 할 수 있어. 한빈이 말했다. 지원은 그런 한빈에게 응. 어차피 핸드폰 별로 안 해. 라고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며 거울로 눈을 옮겼다. 거울에 비친 한빈은 고개를 숙이고, 꺼진 제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원은 고물상에서 제 손으로 직접 폰에 있는 게임들을 하나 둘 씩 지우며 남 몰래 조금 울었다.



지원과 한빈에게는 초중고를 같이 나와 아직까지도 연락하는 친구들도 있다. 정확히 말하면, 한 명은 중학교때 만난 얘지만. 아무튼 지원은 제 인생이 그래도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는 두번째 이유로 이 친구들의 이름을 꼽았다 -첫번째는 마이 럽 마마파파-. 김진환, 송윤형, 김한빈, 김동혁, 구준회, 정찬우. 사실 김한빈은 제게 조금 더 큰 의미였지만, 당시에 지원은 그걸 눈치챌만큼 솔직하지 못했다.
 
 
 그렇게 평생 우리들만이 있을 것 같았던 세상이 우리 둘이 된 것 뿐인데 세상은 전에 모습을 그릴 수 없을 정도로 달랐다. 하루 아침에. 정말로 하루 아침에 모든게 뒤 바뀐것만 같았다. 하루 세 끼 신라면. 티비에서 요즘 한참 틀어주는 윤형 세끼보다 우리 꼴이 더 말이 아니다. 거기 나오는 사람들 힘들어서 얼굴색이 파랗던데. 이름도 똑같고 하는 짓거리도 똑같은게 어쩜 친구 윤형이 생각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다. 연예인들도 그렇게 사는데 인생이 그냥 다 그런건가 봐. 지원은 제 처지를 안타깝게 생각하며 혀를 앞 뒤로 끌끌댔다. 정말이지, 특히나 오늘같이 이렇게 사장새끼로부터 한빈과 같이 데뷔할 수 없다는 청천벽럭같은 소리를 들은 날에는 쉬이 잠을 잘 수조차 없는거다. 식은땀이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등을 적시고 그래도 믿고 따라왔던 사장을 진심으로 떡이 될 때까지 패고 싶어서 엉덩이를 들썩 거리는데 옆에서 한빈이 침착한 목소리로 귀에 낮게 읖조렸다. 가만히 있어봐. 이따 같이 이야기하자. 그러면 당장 식당에서 신선한 유산균이 있는 김치를 있는 힘껏 사장의 귀와 키스하게 하고 싶었던 지원도 어느새 조금 침착해져서 그래도 내 하나뿐인 돈 줄이 이거다. 하면서 가라앉게 되는거다.
 
 
그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던 사장이 지도 미안한지, 둘 중 누구의 눈도 쉽사리 못 마주치고 애꿎은 땅만 바라보며 이어 말했다. 너희 둘이 데뷔하기엔 지금.. 그래, 대중의 시선이 너무 안 좋아. 사실 너희 지금 데뷔도 안한 상태인데 인터넷에 너희 이야기가 그득해. 다 뭔 소리 하는지 알아? 너희 둘 게이라고, 사귀는 것 같다고. 어? 이미지가 그래 너희가. 어린 여자애들이나 뭣도 모르고 좋아하지. 진짜 데뷔하면 어떻게 되는건지 니네도 잘 알거라고 믿는다. 주 연령층은 십대지만 결국 어린애부터 90세 노인까지 다 너희의 이름을 알고, 기억하게 되는거야. 우리 제발 남 인생에 부정적인 영향 끼치는 그런 사람들은 되지 말자?

왜, 솔직해질 수 없는걸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 때 사장의 말이 아예 틀린건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에 우리 둘이 같이 데뷔할 수 없었던건 회사가 두 명분의 뮤직비디오를 찍을만한 형편이 되지 않아서라는건 안 건 한참 뒤에야, 사장이 없는 사장실에 불러간 지원이 몰래 서류 몇 개를 뒤척거리다가 였다. 돈이 없고 이름도 없는 화사에서 지원은 한빈과 실력만으로 회사를 일으켜 세우겠다는 귀여운 야망이 있었다. 물론 그 날 이후로는 흔적도 없이 안드로메다로 가버렸지만 말이다.

이제 가봐. 누가 데뷔할건지는 너희 둘이 알아서 정하기로 하고. 사장은 그렇게 말하며 둘을 억지로 일으켜 세워 문 밖으로 내쫓았다. 마주 보고 있으면 너무 미안해서 한 행동이었지만 지원은 그마저도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사람은 참으로도 솔직할 수 없는 종족이다. 그걸로 인해 생기는 수많은 오해들은 누구를 탓할 새도 없이 상대의 마음에 침식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을 상처 입히게 된다.
 
 
이제 진짜 어떡하지. 당연히 한빈이 데뷔를 하지 않을까, 지원은 자신에게 속삭였다. 우리 둘이 간절하기는 비교하기 무색할만큼 진실했지만 사실 가장 독하게 버텼던건 한빈이었으니까. 5년전 휴대폰 일도 그렇고, 한빈은 언제나 새벽늦게 연습실에서 나와서 꼭두새벽에 다시 잠긴 문을 풀었다. 한빈이 아팠던 날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이미 불이 켜져있는 연습실의 문을 열었고 불이 켜진, 그리고 앞으로 한참은 켜져있을 연습실과 한빈과 남겨두고 지원은 저녁 늦게 집을 항했으니까. 미련이 안남는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웃는 얼굴로 한빈의 데뷔를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다시 한 번 마음을 재검진하고, 꾸며내서 모자란 미소로 한빈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우리 둘 중에는 너가 데뷔해야지, 라고 말할 참이었다.
 
 
“형이 데뷔할거지?
 
 
한빈이 지원의 눈만을 바라보며 말했다. 목소리에 높낮이가 없는게 한빈의 진심을 무덤덤하게 전해주었다. 날이 참 좋다. 지원은 생각했다. 그 상황에서 아냐. 너가 데뷔해야지라는 말이 안 나오는 자신이 미워서. 이런놈이랑 몇 년동안이나 친구 해준 한빈이 고마워서. 그리고 차마 표현하지 못할만큼 미안해서. 한빈은 말했다. 내가 1호 팬할게. 그리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한빈은 먼저 휑 사라져버렸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처럼.

그렇게 떠난 한빈을 본 건 그로부터 4시간이 지난 다음이었다. 연습실에서 제 마스터 키보드랑 마이크를 챙겨 나가려는 지원과 정통으로 마주쳐버려, 머쓱함에 한빈이 어색하게 말을 건넸다. 왔어?
 
 
“김한빈 너 뭐야.”
“뭐가.”
“어디 가려고. 집?”

한빈은 지원을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는, 섬뜩할 정도로 시린 실망감을 가득하게 담고 있었다. 지원은 한빈의 눈동자에 시선을 차마 때지 못하고, 입만 달싹거리다가 한빈이 천천히 지원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것을 그대로 바라만 보았다. 손이, 붙잡아야 하는데. 분명 그런데도 절대로 안 움직이는거다. 잡으면 무슨 말을 해야하지. 무슨 말을 해도 사실 진심은 없을거다. 거짓말이 싫은 지원은 한빈과 제 사이의 솔직한 관계에 그런 흠집이 생기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진심은 오로지 하나. 미안하다. 그 말을 들은 한빈은 저를 원망할 것이다.
 
그걸 알기에 지원은 그를 붙잡지 못했다. 남을 위해 그 모든걸 포기한 그는 지금 다른 누구의 사과를 받아줄만한 상황이 아니라는것은 보지 않아도 뻔했기 때문이다. 손에 철쇠라도 감은듯 한빈이 지나쳐가는 시간이 천만년 같다. 지원의 가슴이 먹먹하게 저려왔다. 

 
그렇게 한빈이 조용하게 나가고 혼자 복도에 남은 지원은 한빈이 타고 내려갈, 그리고 어쩌면 다시는 오지 않을, 엘레베이터가 띵 소리와 함께 도착한 것을 듣고 번뜩 다시 그를 잡기 위해 전속력으로 복도의 맨 끝을 향해 달렸다. 달리고 또 달렸다. 제발 늦지 않았기를 빌며.
 
 
깨닫는건 언제나 늦은 법이다. 지원은 멍하니 이미 한빈을 태운채 내려가고 있는 엘레베이터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 때 아무말이라도 어영부영 했다면 뭐가 달라졌을까.

 
 
 
 
 
 
 
그렇게 돈과 세상에 쪼들리기를 십 오년, 지원은 비로소야 좁아터진 회사에서 데뷔를 할 수 있었고, 첫 앨범의 타이틀곡이 절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프로그램, 무한도전 비지엠으로 깔리는 바람에 순식간에 통장에 불어난 0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날이 왔다. 인생 꿀빠네. 주변인들은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 4년간 지원은 갖가지 컨셉의 노래를 빵빵, 터트렸고 예능을 포함한 방송활동은 거의 전무하지만 실력 만큼은 샘 스미스, 아리아나 그란데도 인정한 수준의 그런 아티스트가 되었다.

 지원은 언제 어디서나 한빈을 제일 친한 친구라고 불렀다. 사실 조금만 속으로 들어가보면 한빈은 지원을 마음에 드는 노래가 있으면 거리낌없이 지원의 귀에 제 이어폰을 꽃아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라 생각했고 지원은 한빈을, 글쎄다.




*****

비아이의 얼굴이 당장이라도 모니터에 빨려들어갈 것만 같이 가깝다. 타닥, 타다닥, 제대로 불이 붙었는지 자판으로 음표를 찍는 속도가 아까전과 확실히 다르다. 밖에서도 비슷한 소리가 방 안으로 스며 들어왔다. 요즘 들어 통 환한 햇빛을 못 봤는데. 몇 일 전에 흐린 하늘을 보면서 비아이는 비가 올 것을 예상했다. 그렇지만 막상 비가 오는 지금 비아이는 밖에 비가 오는지 눈이 오는지도 모를만큼 작업해 열중해 있었다. 몇 일 전부터 머릿속에서 재생되던 노래를 옮기기는 했는데, 평소와는 달리 쓰면 쓸 수록 자꾸 수정하고 싶은 가사에 자꾸 지우고 또 지우고 하다보니 막상 남은건 빈말로도 길다구 할 수 없는 벌스파트 뿐 이었다. 오늘이면 완성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영 속도가 나지 않는 악보를 바라보다 마지못해 비아이는 작사노트를 덮었다. 차분히. 이럴 때는 머리를 싹 다 비우고 하는게 좋다. 아주 오래전에, 연습실에서 지원이 제게 해준 말이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이렇게 곡이 안 써질때에는, 등을 쭉 의자에 기대고 고개를 상하좌우로 늘리고는 하는데, 확실히 그러고 나니까 곡이 술술 써지는듯한 느낌이 들어서 그렇게 그건 한빈에게 몇 없는 노하우로 자리매김까지 했다. 여느때와 같이 머리를 위, 아래, 왼쪽으로 최대한 시원하게 늘려주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을때, 비아이의 시야에 노란색 포스트잇이 잡혔다. 직업상 포스트잇을 붙일 일이 거의 없는데 왜 저게 여기 꺼내져 있지. 위화감을 느낀 비아이가 뒷목을 긁적인다. 몸을 앞으로 하고 손을 뻗어 포스트잇을 한 손에 쥐었다. 반사적으로 뒤로 조금 밀려난 의자에서 끽끽 하는 소리가 났다.

비아이는 고개를 숙여 제 손에 있는 노란 포스트잇을 바라보았다. 얼굴에 빛이 닿는 면적이 적어지자 자연스레 비아이의 얼굴은 물론이고 포스트잇에도 포근한 회색의 그림자가 스며들었다. 사놓고 나서 뜯은 기억이 없는데 벌써 몇 장이 뜯겨나가고 없다. 진짜 뭐지? 지원이형이 말도 안하고 썼나? 그런데 이걸 뭐에다가 써? 사소한거에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 비아이는 머릿속으로 지원과 포스트잇의 상관관계에 대한 논문을 쓰다가 뒤늦게야 의미없는 짓이라는것을 깨닫고 나서야 다시 포스트잇을 책상위에 올려놓고 곡 작업에 매진할 수 있었다.
 
 
원래 시험공부든 뭐든 해야할때가 가장 하기 싫은 법이라고 비아아는 제가 방금 전 한 생각도 사실 곡이 너무 쓰기 싫어서 도피처로 삼은 것 일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다. 차라리 딴 걸 쓸까, 라는 생각을 한 동시에 비아이가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진짜 왜 딴 걸 할 생각을 하지 못했지? 안 써지면 그냥 딴 걸 써서 메꾸면 되는거 아니야? 바보다. 정말 이런 바보가 따로 없다 느껴졌다. 비아이는 다시 악보를 적다 만 작사노트를 펼쳤다. 글자보다 많이 그어져 있는 줄들. 이렇게 지우고 지우다 보면 지금 남아있는 것마저도 지워야 할지도 몰라. 내심 투자한 시간이 아깝다 느끼는 비아이는 일부러 써놓은 가사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바로 다음장으로 넘어갔다. 원래 이런 식으로 킵해둘 때는 한 두장 정도는 건너 뛰고 새로운걸 쓰는데, 나중에 혹시 이어쓰고 싶을까봐 하는 일종의 습관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냥 바로 첫 장부터 글자를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정말 제 솔직한 마음을 표현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동안 차마 전하지 못한 말들이 헤드폰 줄을 타고 넘실넘실 흘러넘쳤다. 비아이는 등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애써 무시하고 태연한 척 지원을, 정확히는 그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제가 하는 소리를 소리를 듣는 모습을 보는건 아주 민망한 짓이어서, 비아이는 아주 조금 후회했다.
 
 
지원은 귀를 타고 들어오는 말들에 정신을 잃을뻔 한 것을 겨우 붙잡고 두 팔을 책상에 박은채 위태롭게 서 있었다. 지금 듣고 있는게 이어서 재생될 노래의 나레이션이길 바라지만 그럴 가능성은 0%에 가까웠다. 노래를 들려준다고 한 애가 지금 왜 고백 청취록을 들려주고 있지. 정말이지, 이해 안되는 일 투성이다. 헤드폰 줄을 타고 들어온 소리는 액체로 따지자면 휘발유라도 되는 듯, 지원의 마음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불행하게도, 그건 사랑의 불바다가 아닌 빡침의 바다였다. 여전히 재생되고 있는 파일이 무색하게 지원은 거칠게 헤드폰을 집어 던졌다. 비아이는 던져진 헤드폰을 보고 화면에 채 끝까지 가지도 못한 재생바를 본 다음에야 지원을 내려다 보았다. 지원의 표정은, 비아이에게 낯설다면 아주고 낯설고, 새롭다면 더 없이 새로운 표정이었다.
 
 
실수했다. 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단지, 지원이 저리 화가 난 이유를 전혀 갈피도 못 잡겠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다.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발작이라도 난 듯 책상 안 공간에 발차기를 한 지원이 비아이에게 물었다.
평소에도 결코 높다고는 할 수 없는 목소리였지만 지금 낮게 그르렁 거리는 지원은 그 어떤 어둠보다 무거워 비아이는 고요한 방안에서 작지 않은 소리로 침을 삼켰다.
 
 
" 이걸 들려주는 이유가 뭔데."
".....”
" 내가 걔 대치품이라도 되는 줄 아나보지?"
"....."
" 착각하지마 등신아. 난 걔가 아니야."
 
 
니 그 놈 대하는 것 처럼 굴지마. 진짜 토 나오니까. 사실 지원도 자기가 뭐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났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뭐가 뭔지도 모른채 그냥 당장 저를 짐식시키는 생각들을 걸러내지 않고 뱉어냈다. 그로 인해 비아이가 받을 상처는 신경도 안 쓰일만큼 지원이 받은 상처는 너무나도 컸다.
 
 
항상 한빈을 친구로만 봐 왔다고 하면 거짓말 일거다. 그렇지만 정말로, 비아이만큼 달랐다. 지원은 맹세코 말했다. 설령 복사판보다도 똑같이 생겼다해도 지원은 비아이를 상대로 한빈을 떠올리거나 하지는 않았다고. 그건 그래도 걔도 걔 나름대로의 인생이 있고 가치관이 있을텐데 그 모든걸 한빈이라는 한 카테고리에 묶어두는것은 절대 한빈에게도, 비아이게도 절대 해서는 안될일이라고 생각했다. 서로가 서로를 서로가 아닌 사람으로 바라본다는것은 정말 미치도록 소름 끼치고, 미안해야만 해야 하는 일이다. 지원은 크게 방문을 닫고 눈에 보이는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사실 방이 두 개 뿐이라, 딱히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에 들어간 것이 맞다.

그러니까, 지원은 지금 상처 받은거다. 물론 비아이는 물론 지원 본인도 눈치 채지 못했지만. 저를 오로지 저 자신으로 보지 않는 듯한 기분은 생각보다 너무나도 더러웠다. 진짜 집 나갈까. 나가면 몇 일 사이에 굶어 죽을것이 분명한데도 지원은 그런 생각을 했다.

 
 
*****
 
방안은 여전히 어두웠다. 유일하게 인기척을 내는건 지원과 비아이밖에 없는 끝이 없을 것만 같은 밤, 새벽. 지원은 꿈결에 누군가의 중얼거림을 들었다.
 
 
“20일.”
“.....”
“....미안해.”

*****
 
 
 
몇 일 동안 제대로 말도 안하고 뿡 뿡 끼어대던 방구도 이제는 조용히 방에 가서 뀐다. 아, 한 집에 살면서 이게 얼마나 불편한 일인가. 둘 만 있으면서 그 아무도 말을 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남들은 뭐가 문제인가 하겠지만 둘한테는 정말로 심각한 문제이다. 왜냐면, 지금 둘이 있는 곳은 식탁이거든. 앞에는 초라하지만 형편에 맞춰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3첩 밥상이 차려져 있었고 손에는 앙증맞게 젖가락이 쥐어져 있었다. 지원의 손이 살짝 덜 익은 듯 한 스팸 구이쪽으로 향하다가 멈칫했다. 아, 진짜 못 참겠다. 내가 처음 여기 온 날에도 이렇게까지 안 어색 했는데.

지원은 젓가락을 테이블에 쾅 내려 놓았다. 사실 거짓말이다. 그러려고 했는데 앞에서 무표정으로 밥 먹고 있는 비아이가 급 무서워서 그냥 조용히 밥에 꽂았다. 팔을 내리고 정면으로 쳐다봐야 고개를 들어 지원을 바라보는 비아이다. 뭐가 문제냐는 듯. 그리고 어쩌면, 조금은 빡친다는 듯한 얼굴로 비아이는 지원을 쳐다보았다. 눈으로 밥 한 번, 지원 한 번 훑어보고, 입에 있던 걸 마저 씹어 삼킨 다음 입을 연다.
 
 
"다 먹었으면 가."
 
 
아직 지원의 공기에 밥이 반 공기 이상 남아 있는걸 봤음에도 불구하고 차갑게 말하는 비아이를 보고 지원은 내가 뭘 잘못했나?? 생각하다가 그냥 쟤 나랑 말하기 싫은거구나.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좀 더 먹고 일어날걸. 일어나면서도 자꾸만 식탁에 있는 스팸이 눈에 밟힌다. 먼저 사람 착각해가지고 좋아한다고 고백한게 누군데. 그리고 설령 내가 잘못이 있더라도 스팸은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지원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깨작 깨작 먹고 있는 비아이를 그냥 두고 가기에는 찝찝해서 입을 열었다 닫았다. 진짜 평생 이렇게 사일런트 힐 같은 분위기에서 살 수는 없다! 결국 싸나이 답게 밀고 나가자고 굳은 다짐을 하고 지원이 말을 걸었다. 사실 그냥 생각 없이 한 아무말 이었다.
 
 
"너 아직 나 좋아하냐?"
 
 
푸우웁-. 비아이의 입에 있던 음식물 뭉텅이가 식탁에 뿌려졌다. 아.. 그 분수보다 아름다운 광경은 혼자 보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이 들 정도였다. 아까 까지는 분명 사람이 먹는 음식이었는데. 이제는 비아이의 입에서 파편같이 튄 음식물 찌꺼끼 때문에 보는 것 만으로도 죄 짓는 것 같다. 지원이 뭐하냐는 식으로 비아이를 바라보자 고개를 숙인 비아이가 오른손으로 입을 닦으며 일어난다. 그러고는 제일 가까운 방으로 무작정 들어갔다. 그 모든걸 바라보고 있던 지원은 밑을 보고는 바로 온 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아 새끼 턱에 구멍이 뚫렸나.. 바닥까지 다 튀었어.....

아무 방이나 무작정 들어온 비아이는 사춘기 소년처럼 문을 쾅! 닫고 바로 걸어 잠궜다. 다른 방 하나는 잠금장치가 없는데 그래도 이 방에 들어와서 다행이다. 아까 대체 내가 무슨 일을 한거지. 평생 남들한테 못 보여준 쪽팔림 지금 지원한테 몽땅 보여주고 있는 기분이다. 옆으로 슬쩍 고개를 들리자 탁상 거울에 얼굴이 비춰 보인다. 미친.. 비아이는 자신의 새빨간 얼굴에 감탄했다.




*
 
 
생각할 수록 진짜 미치겠네. 지원은 쪼그라 앉아서 비아이가 뱉은 건더기들을 티슈로 손수 치워가며 중얼거렸다. 내 나이 또래가 아니라 5살 짜리 꼬마애랑 동거해도 이보다는 덜 유치할 거다. 씩씩대며 방으로 가는 비아이의 귀는 그 언젠가처럼 붉었다. 얼굴을 못 봐서 아쉽긴한데. 지원은 제가 한 생각에 깜짝 놀랐다. 얼굴을 못 봐서 아쉽다고? 아니 대체 왜? 지원은 머릿속으로 비아이의 터질 것 같이 붉은 얼굴을 상상했다. 귀는 조금 더 빨갛고, 눈은 당황에 가득 찬. 그리고 입은 어쩔 줄 몰라 파르르 떨리고.

어느새 지원의 귀도 분홍빛으로 닳아 올랐다.

그니까, 내가 좋다는거 아니야, 저 민짜 땐 것 같지도 않은 놈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보여주니까 여태까지 어떻게 숨기고 살았는지 궁금할 정도다. 비아이는 좀 강하고 잘 안 표현하는 스타일 아니었나? 완전 캐붕이다. 캐붕. 팬픽이라고 너무 망가지는 모습만 보이는 비아이에게 미안해졌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 보니까 거절 하는것 보다는 잘 타이르는게 더 나을 수도 있겠다. 게이라고 마냥 찝찝한 것도 아니네. 어쩌면 전처럼 친구로 지낼 수 있을 지도 몰라. 지 일 아니라고 막 생각하는 지원은 또 다시 무대포 정신으로 비아이를 추적해 아까 비아이가 걸어 잠근 방을 노크했다.


*

어쩌고 저쩌고 그러니까 우리 그냥 친구하자. 비아이는 지금 사람 얼굴을 하고 개소리를 지껄이는 지원을 어이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올라간 한 쪽 입꼬리가 무섭다. 쟤는 친구의 정의가 뭔지 모르나. 프렌즈 위드 베네핏은 개뿔. 갑자기 노크하는 바람에 책상 밑에 숨겨둔 -대체 왜 있는지 모르겠는- 야구방망이가 절실해진다. 이걸 진짜 한 대 내려쳐?? 그래도 한참 질풍 노도의 시기일때, 데뷔는 해야겠으니 술 담배는 못하겠고, 괜찮을 것 같은 주먹질만 (전혀안괜찮음일단아님) 랭킹 십위권 놈들이랑 좀 했는데, 그 때 쌓아둔 깡따구가 지금 여기에 쓰라고 있는건가 싶다. 비아이는 쥐었다 폈다 힘 빠지게 웃었다 말았다 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뭐라고 말해야 알아 들을까. 그것이 문제로다. 아니, 사실 뭐라고 해야 내 기분이 괜찮을까가 훨씬 더 중요하다. 사람은 어디까지나 이기적이게 태어났으니까. 그래도 그렇지, 지금 이기적인건 내가 아니라 쟤 아니야?? 두 살이나 차이나지만 지금은 지원이 천하의 개새끼니까 사람 취급 안해주는건 가볍게 넘어가도록 하자. 지원이 방긋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나같은 친구 어디 없다."
 
 
어디사는 누가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했는가. 비아이는 시속 150km 이상의 공을 던지는 놀란 라이언보다 빠르게 지원의 얼굴에 뜨거운 침을 뱉었다. 충분히 그럴만 했다.


 
*****
 
“17일.”
“.....”
 
지원은 아직 꿈에서 벗어날 자신이 없었다.

*****

 
 
 
노래는 수정을 거치지 않고 해야 잘 나오는 법이다. 비아이는 생각했다. 최대한 처음 생각한걸 그대로 옮겨야 거칠고 잘 다듬어지지 않은 부분도 사람들에게 열쇠처럼 잘 맞는 법이라고. 사람은 완벽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매끄럽지 않은 부분을 매끄럽게 맞춰줄 노래를 찾는거다. 비아이가 노래를 좋아하는 이유는 다양했지만 그 중 하나만 뽑아서 말하라면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제가 보고 느끼는 세상을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어서라고 말했다. 가장 순수했던 때, 따스한 햇빛으로 샤워하며 무럭무럭 커가는 풀들과 함께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던 그 때.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모르고 잔디밭에서 축구하고 놀았던 때가 가장 좋았던 것 같아. 다시 그때로 돌아가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린걸 알면서도 괜히 그때의 제가 하염없이 부러워지는 비아이였다. 이기적인걸 알면서도, 그는 그 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동심을 동경. 우습지만서도.

사진사들은 제가 보고 싶은 찰나의 순간을 영원토록 보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은 참 이기적이다. 제가 듣고 싶은 걸 들으려고 지 마음에 드는 노래들로만 플레이리스트를 짜고 제가 두 눈으로 보고 싶은 걸 듣기 위해서 그림을 그린다. 비아이는 두 눈을 깜빡였다. 이렇게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 왜 남들에게 칭송을 받는지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비아이는 좀 더 객관적으로 저를 들여다보았다. 비 때문에 감성적으로 변하기는 했는지 평소같으면 하지도 못할 생각이 두둥실, 머리위로 떠올랐다. 비아이는 어이없다 생각하면서도 생각하는것을 멈추지 못했다. 거창하고 볼 품 없지만, 한빈은 진심으로 이기적이고 말도 안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문학을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어째서 천재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똑 똑. 노크소리가 잔잔하게 밤을 울렸다.

들어와. 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으니까 비아이는 너무나도 쉽게 제 공간에 남을 들일 수 있었다. 예전이랑 마찬기지로 이 집에는 저와 지원뿐이니까. 한 달이라는 긴 시간동안 지원을 볼 수 없었던 때가 정말로 지옥이었다. 그건, 둘이서 나눠서 내던 월세를 혼자 부담하게 됐을때와는 다른 공포였다. 천천히 독살시키는, 그런 무언가. 비아이는 저도 모르게 왼손으로 오른손을 쓰다듬었다. 몸의 어딘가가 굉장히 시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원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거실에는 불이 켜져있는지 불이 환히 켜진 방에 들어오자 지원이 조금, 눈을 찌푸렸다. 그러면 비아이는 지원에게 붙은 매끄러운 빛이 좋아서 얼른 문을 닫고 이쪽으로 오라고- 재촉하게 되는거다. 딸칵. 지원이 문을 닫는 소리가 방안을 두번째로 울렸다. 가만보면 제 주변을 요동치게 하는건 지원밖에 없는듯 해 비아이는 낮게 웃을 수 있었다.

" 왜 들어왔어."
" 너 뭐하나 궁금해서."
" 내가 여기있으면 당연히 푹 자는거지. 뭐 다른 이상한거라도 생각했나봐?"
 
지원이 쿡,하고 웃었다. 야 너도 그런거 보냐? 놀리듯이 장난스럽게 나오는 말에 비아이는 지가 말해놓고서 "그런거?!? 형은 머릿속에 그런것밖에 없어?" 하고 투닥거리는거다. 지원이 더 가까이 다가와서 켜진 컴퓨터 화면을 바라본다. 그 까만 눈동자에 그보다 더 까만 화면이 시원하게 비춰진다. 지원이 히죽대며 말했다. 아직 드럼도 안 찍어놨네? 곡 작업하고 있다는 애가?"
아까전부터 비아이를 보고 있던 우리는 알지만, 방금 막 들어온 지원은 정말 아무것도 찍힌게 없는 비아이의 화면을 보고 이젠 진심으로 얘가 나 몰래 뭐 좋은거 보고 있었나.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 아니 미친? 나 방금 저장하고 지금 새 거 만드는거거든요? 야동 보던거 아닌데요??"
 

하고,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사실은 결백한 비아이가 얼굴을 붉히고 이야기한다. 지원은 니가그러니까더수상해보이는건아니 라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전에 교포 아니냐고 놀려 먹을 때 맛 본 뜨거운 사내의 주먹이 생각 나서이다.

지원은 들고 온 머그컵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비아이는 뭐냐는 듯 느리게 지원의 얼굴을 올려다 보고, 지원은 ' 너 목마를까봐' 하고 멋진 남자 st 흉내라도 내는듯 싱긋 웃어보인다. 지가 뭔 연예인이라도 되는 줄 아나봐. 연예인 맞지만. 원래 래퍼들은 다 저렇게 재수가 없나? 그래도 성의는 고마워서 비아이는 무심하게 잘 마실게라 말하고 상남자처럼 벌컥벌컥, 원샥할 기세로 마시기 시작했다. 지원은 그런 비아이를 -정확히는 컵을- 멍하니 보다가 그제서야 할 일이 생각났다는듯 야 그럼 난 옆에 방 가 있는다 라 말하고 미련 없이 뒤돌아서 방을 나선다. 비아이는 정말 이거 하나 가져오려고 들어온건지 의심스러웠지만 그래도 작업중에는 무조건 물이 있어야 하는 타입인데 그걸 혹시 지원이 알고 그런건가 하고 볼을 붉혔다. 그리고 그는 눈을 내리깔아 벌써 다 마시고 없는 물컵을 바라보았다. 덥썩 손을 뻗어, 손잡이가 아닌 둥근면을 조심스레 잡아 얼굴에 가까이 댄다. 아까 지원이 이 손잡이를 잡고 전해줬지. 이런식으로 온기를 느끼는건 처음이지만, 사실 그동안 너무 자제한건 사실이기에 가끔은 이런식으로 풀어줘도 괜찮다고 생각한 비아이였다. 그는 지원이 잡고있던 손잡이에 쪽, 가볍게 입 맞췄다. 아아, 코코아라도 탄 것 같이 마냥 달다. 얼굴이 붉어지고 입꼬리가 올라가는게 피부로 느껴진다. 그리고 좀 더 맛보고 싶은 비아이가 혀를 내밀어 핥으려고 했던 참이었다.

" 야 근데 우리 저녁 뭐먹냐?"

 정말 너무하게도 하필 그 때, 옆에 방에 가있겠다고 했던 지원이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뜬건지 감은건지 긴가민가 한 지원의 눈이 정말 당장 전세계 사람들을 대상으로 가장 눈이 큰 사람을 뽑는 대회에서 일 등을 할 만한 크기로 커졌다. 비아이는 쪽팔림, 당황스러움, 그리고 그 모든것을 뛰어넘는 이루말할 수 없는 감정에 손에서 컵을 놓았다. 무릎에, 그리고 바닥에 용케 안 깨지고 굴러다니는 컵을 무의식중에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지원은 너무놀라서 잘 나오지도 않는 제 모국어에 답답함을 느낄 새도 없이 일단 나오는 말을 무조건으로 뱉어냈다.
 
 
" 나.. 화장실에 휴지 좀 쓴다!!!"
 
 
그리고 또 다시 쾅, 소리를 내며 문을 닫는다. 쌩하고 사라져버린 지원을 비아이는 아씨발진짜좆됐다 를 담은 초첨 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왜 하필 지금. 이라는 생각보다는 비아이는 현실적으로 앞으로 지원을 마주할 날들을 생각했다. 진짜 죽을까. 진짜. 진짜.......
 
 
키보드 치는 소리가 강물에 떨궈지는 빗물 소리처럼 고요하게 울리던 방에서는 비아이의 처절한 절규하는 소리와 책상에 크게 머리를 박는 소리로 가득찼다.


방에서 뛰쳐나간 지원은 생각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아니 고민했다. 아니 고뇌했다. 사람의 정체성, 캐릭터, 행동범위, 아이덴티티에 대해 고심하고 또 고심했다. 아까 본 생물체는 분명 비아이였다. 아니 비아이가 맞나? 그건 정말 비아이였을까. 내가 아는 비아이는 형진짜제대로할줄아는게뭐야아니지금웃음이왜나오는데형조증이야조증이지왜그럼여기있어얼른병원에나가보지 등 정말 사람 가슴에 악랄하게 비수를 꽂는 인간인데 아까 그건, 그건.. 정말 비아이가 그런 행동을? 내가 잘못 본 게 아닐까? 그래, 차라리 그게 더 현실성 있겠다. 오늘 잠을 설쳐서 헛 것을 본거야. 나름대로 자기 자신과 타협을 하고, 지원은 아까보다는 나은 표정으로 아까보다 천천히 같은 곳을 서성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 비아이가 있는 방에서 자그만하게 절규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으아.......윽.......아 씨발.....아악........
 
 
지원은 눈물을 머금고 인정하는 수 밖에 없었다. 아까 본 건 비아이다. 레알 팩트 비아이다. 잘못 본 게 아니다.. 잘못 본 게.........
 
 
지원은 와중에 콩닥이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하는 제 자신이 미웠다.
 

*****
 
 
 
이십일째. 무려 이십 일째다. 진짜 비아이는 미친것이 분명하다. 지원은 지금 저기 옆모습만 조금 보여주고 있는 비아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누가 나 좀 데리고 나가줘... 밖에 안나간지 20일째야..... 비아이가 반응이 없자 이내 지원은 성량을 조금씩 높여가며 밖....! 밖이 너무 가고 싶다.. 밖이..! 밖에 내 보내줘..! 마지막에는 비아이가 무시할 수도 없게 큰 소리로 거의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비아이는 지원이 성악을 전공 했다는 자신의 생각을 다시 한 번 확신하며, 고개를 돌려 김지원을 바라보았다. 김지원이 땅바닥에 흡사 사족보행하는 야생동물처럼 널부러져 있었다. 음, 음. 그래. 대체 뭐가 문제니 지원아. 내가 등 따숩고 배 부르게 해주면서 돈도 안 받고 있는 중인데. 그렇게 나에게 돈을 주고 싶었니. 정작 매달린건 자신이었으면서, 그거 하나 자각하지 못하고 비아이는 지원의 빈대같은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본다. 지원이 주섬 주섬 일어나서 양반다리를 하고 비아이에게 말했다.

“ 나가서 축구 한 판 할래?”
“ 뜬금없이 왠 축구?”
“ 야... 너가 핸드폰 없이 20일 버텨봐. 제발 진짜... 나 심심해서 돌아가기 일 보 직전이다..”
 
 
그러고 지원은 비아이의 바지춤을 마구잡이로 흔들어가며 말했다. 제발 나 좀 데리고 나가줘. 응? 갈거지? 가는거다? 빼기 없어? 오케이 난 가서 준비하고 올게! 비아이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혼자 들떠서는 벌떡 일어나서 방문 밖으로 나가는 지원이다. 비아이는 방금 쟤 뭐라고 한거야..? 생각하며 자리에 10초 정도 앉아있다가 다시 컴퓨터로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쓰고 있던 노래를 저장시키고, 전원을 껐다. 그래, 오랜만에 운동이나 하자. 요즘 곡이 잘 나와서 컴퓨터에 앉아만 있어서 활동량이 너무 적긴 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틈틈히 몸관리를 해왔지만, 지원에게 꿈을 양보하고 나서부터는 딱히 관리를 하지 않아서 조금씩 불어나는 듯한 ( a.k.a. 비아이만 느낀 뱃살) 몸에 위험하다 느낀 비아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뒤에 있는 옷장문을 열었다. 운동복을 넣어둔 서랍에는 벌써 먼지가 회색빛을 자랑하며 곱게 쌓여있길래 비아이는 에구, 하며 오른손으로 한 번 쓰윽, 먼지를 닦았다. 몇 년 전 지원과 같이 맞춘 검정색 운동복이 가장 먼저 눈에 밟혔다.

“ 비아이, 나 생각해보니까 운동복이 어디있는지 모르겠어.”
 
 
 지원의 시선이 쭈그려 앉아 들여다보고 있는 서랍으로 시선이 옮겨갔다. 안에 들어 있는게 전부 운동복 이라는걸 깨달은 지원이 어! 나도 하나만! 을 소리치며 성큼 비아이의 곁으로 다가왔다. 비아이는 안에 들어 있는 수 많은 지원에게 꼭 맞는 사이즈를 내치고 저와 지원이 맞춘 옷을 꺼냈다.

“ 이게 형... 그니까 여기 있었던 지원이 형이 제일 최근에 산거야.”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믿은 지원이 고마워! 하고 잽싸게 옷을 손에서 가져가서 바로 그 자리에서 바지를 벗기 시작했다. 비아이는 다시 뒤돌아 서랍에서 제 사이즈의 운동복을 꺼냈다. 제가 이걸 입는걸 알면 지원은 죽어도 저거 안 입으려 하겠지. 그렇다면 이렇게 몰래 입는게 가장 현명한거다.

바로 입을 줄 알았던 지원은 의외로 방문을 열어 방 밖으로 나갔다. 갑자기 부끄럼 타나. 왜 나가지 싶었던 비아이도 어차피 지금 지원이 나가면 옷 갈아 입겠다고 돌아올 일은 없을 것 같아서 가만히 있었다. 아주 양심 없는 놈은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비아이는 서랍문을 슬그머니 닫았다.

맞다. 결국 그 침 튀기는 -진짜로 침 튀기는- 고백은 그렇게 흐지부지 끝났다. 결국 지원이 바란대로 저와 지원은 다시 평범하게 지내게 되었고 심지어 그 일은 이제 양 쪽 다 묵인한다. 정말이지, 씁쓸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적어도 제대로 된 답이라도 받고 싶었는데. 작년에 안 좋게 헤어지고 내년에 같은 반에서 만나 어쩌다가 다시 친해진 엑스 보이프렌드 느낌이다. 비아이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사실 지원이 이 상황에 있었으면 이렇게 말했을거다. 야, 그게 어떻게 같냐? 그건 그래도 사귄거잖아. 한 번이라도.

방 문 넘어로 도어락 푸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나, 깊게 생각에 잠긴 비아이의 귀 안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지원은 지금 몇 일만에 맡는 바깥냄새에 심하게 심취해 있다. 아 이게 얼마만의 미세먼지인가! 그는 지금 제 폐 속을 부비고 있는게 맑은 시골 공기가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크게 숨을 들이마시는 걸 멈출 수 없었다. 몰래 말 안하고 나온거기는 하지만, 설마 비아이가, 설마 '그' 쿨한거 좋아하는 애가, 설마 '그' 0.5 짱이 제게 뭐라고 잔소리 하는것은 쉽게 상상할 수 없었던 지원은 그래도 조금 찝찝했던 마음을 털어버렸다. 그냥 지금 이 순간 만큼은 현재에 집중하도록 하자. 주변은 온통 낯선 건물 뿐 이어서 지원은 모험을 떠나는 느낌으로 앞으로 갈 수 있었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나온건 아니었지만 막상 밖에 나오니 아무 생각이 없어진 지원은 급한대로 대충 목적지를 잡았다. 일단 저기 저 건물 쪽으로 가자. 앞에 걸어다니는 여자애들을 무작정 따라 가는거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당연히 예쓰다. 번호 물어보면 알려줄까. 나 근데 여기 있을 날 몇 일 안 남았는데. 지극히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며 지원은 그렇게 은근슬쩍 앞에 여자애들이 떠드는 이야기를 엿들었다. 긴 생머리가 말했다.

"너 왜 말 안했냐."
"아니 나도 방금 알았다니까?!"
"그럼 차라리 끝까지 말해주지 말지 그랬어."
"......"

뭐야. 싸우나. 꽤나 진지한 대화에 지원은 괜히 나왔나 다시 들어갈까 생각했지만 이어서 이어지는 단발 머리의 말은 지원의 발목을 붙잡았다.
 
"비아이 나도 좋아했어. 너 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도 슬퍼. 계속 노래 듣고 싶었고, 나중에 메이저 데뷔하면 팬카페도 가입하고 그러고 싶었어. 정말로, 나도 가볍게 하는 말 아니야."
 
 
긴 생머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단발 머리는 그렇게 말했다. 지원은 제 귀를 의심하는 일 밖에는 할 수 없었다. 비아이가 언제부터 저렇게 흔한 이름이었나. 지금 저랑 같이 살고 있는 사람 이름도 비아이, 저 여자애들이 이야기하는 사람도 비아이, 저 사람도 비아이, 이 사람도 비아이. 그렇지만, 지원은 온 지 몇 일 안 된 날, 비아이를 한빈이라 생각했던 그 때 나눴던 대화를 기억해냈다.

「야 근데 한빈아.」
「한빈? 한빈이 누구야.」
「한빈이가 설마 나야? 나 이름 비아이인데.」
「비아이? 무슨 한국인 이름이 그래? 연예인 이순규 급인데.」
「미친놈이? 나 교포라 그래!」

솔직히 말해서, 비아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대한민국을 손에 지워서 털털털 털어봐도 몇 명 나올까 말까 한 이름이다. 그만큼 특이한 이름을 가진 사람이 그 비아이 말고 또 어디에 있을까. 지원은 서둘러 벌써 멀리 가버린 여자애들을 뒤쫓았다. 모르는 놈이 덥썩 어깨를 잡아오자 꺅! 소리 지르며 당장이라도 얼굴을 향해 불꽃 스메쉬를 날리려던 여자애가 지원의 얼굴을 보고 차갑게 굳었다. 김지원...?

"야 내가 지금 너무 피곤해서 헛게 보이나 봐."
"어? 너도? 나도."
 
 
옆에 긴 머리가 수긍하며 고개를 텅 빈 눈동자로 김지원을 쳐다보며 말했다. 너 눈에도 보여..? 단발 머리 여자애가 느릿느릿하게 대답했다. 웅... 그러자 긴 생머리도 짧게 대답했다. 미친...
둘이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 다시 가려고 하길래 지원이 서둘러 다짜고짜 용건부터 꺼냈다. 야 너희들 그게 아까 그게 무슨 이야기야?! 긴 생머리가 아직 지원의 존재를 이해하지 못하고 단발 머리에게 말했다. 허허허 야 나 아직도 들려. 단발 머리가 진지한 얼굴로 뒤의 말했다.
 
 
"진짜죠."
 
 
사실 확신은 없었다. 그저, 믿고 싶었을 뿐이다. 설마 진짜 혹시 마사카 정말 그 지원일 것만 같아서. 제 넘버완 페이버릿, 천재 래퍼 김지원. 그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지만. 여자애는 신을 믿지는 않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알라신에게 훌라훌라 댄스라도 쳐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진짜 김지원 맞죠."
 
 
그제야 문맥을 이해하고 한 달전 슈퍼스타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느끼며, 그렇지만 너무나도 절박해서 아주 잠시 느끼며, 지원은 대답했다. 웅. 웅. 웅. 나 맞아. 나 맞으니까 아까 이야기 좀 이어서 해줘.
최애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을 하고자 여자애는 기억을 더듬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비아이가, 아! 그러니까, 비아이님이.. 몇 일전에 뉴스가 하나 났는데.. 연예인 누가 익명으로 신고해서.. 자꾸 자살..하려고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진짜.. 사실 처음에는 사람들한테는 별로 화제되고 그러지는 않았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막, 무명 가수가 이렇게 힘들게 산다고 하면서 뉴스 막 찍어오고.. 근데 그게 유명해진거에요. 정확히 뉴스 내용이 비아이님이 집에 혼자 있으면 자꾸 밥도 안 먹고 가끔 그렇게 죽으려고.. 한다는 내용이

지원은 하나 하나 참을성 있게 듣다가, 집에 혼자 있을 때 그런다는 말을 듣자마자 집으로 달려갔다.

괜찮아..? 옆의 긴 생머리가 물어온다. 단발 머리가 대답했다. 난 내 할 일을 했을뿐... 왼쪽 눈에서 눈물이 비집고 흐른다. 아! 얼마나 아름다운 팬 사랑인가. 긴 생머리가 단발 머리의 등을 토닥여 주고 단발 머리는 그 품에서 딱 다섯 방울의 눈물을 흘렸다.



야!!!!! 목청이 터질만큼 큰 소리로 비아이를 지목하며 김지원이 우당탕탕 들어왔다. 옆에 사는 동순이는, 옆 집에서 목숨이 오가는 싸움이 일어날까봐 주저 주저 경찰에 신고하기를 망설였다. 꾸겨져 들어온 지원의 얼굴이 꾸깃꾸깃하다. 사실 별로 할 말도 없는데 일단 주목을 끌려고 크게 소리친게 맞다. 혹시라도 안좋은 생각 하고 있을까 봐, 그러면 큰 소리에 놀라서 멈추지 않을까하고. 큰 소리에 놀라서 상황이 더 악화 될 수 있다는건 전혀 안중에도 없는 지원이었다.

비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아까부터 쭉, 기다리고 있었던 목소리에 그는 집에서 기다리던 강아지 마냥 빼꼼 고개를 들어 소리의 원천지를 향해 귀를 기울였다. 안 돌아올 줄만 알았다. 다시는 못 보는줄만 알았다. 언제 올 지 몰랐던 것 처럼 정말 빠르게 사라져도 이상할 것 없는 사람이니. 비아이는 새삼 이다지도 불공평한 관계에 억울해졌다. 지원이 쿵 쿵 대는 발걸음으로 좁은 집안을 두리번 거리다가 저기 구석에 웅크려 앉아있는 비아이를 보고 서둘러 그 쪽으로 걸어갔다. 비아이 주변에 약이나 피 같은게 없는걸로 보아 그래도 아직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구나. 싶어 지원이 조금 안심했다.
"혼자 있어서 울었어?"
아니. 너가 떠날까봐 울었어. 이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 내려앉았다. 저렇게 말하면 다시 부담 가질지도 몰라. 아직 못 잊었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친구로 지낼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는 이제 뻔하다. 그러니까 비아이는,

"아니 그게 아니라, "

그 때였다. 지원이 있는 힘껏 비아이를 안았다. 포근한 품은 정말 변하지도 않는지, 처음 지원이 찾아왔던 날과 다름 없어서 비아이는 히끅대며 딸꾹질이 나왔다. 그러게. 왜 울고 있을까. 비아이는 자신에게 묻고 싶었다. 시간이 비처럼 흘러간다. 이렇게 흐르고 흐르는 물에 몸을 맡겨 내려가면 강물이 나올까. 그도 아니면 바다가 나올까. 비아이는 온몸에 힘이 빠진듯 지원의 몸에 기대 제 입에서 아무말이나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마치 방전 된 것만 같다. 입은 떨리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고 팔은 떨리지만 지원을 안을 힘은 없었다.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일부러 세우려다가, 지원이 천천히 쭈그려 앉는 동시에 앉히려 하자 얌전히 그에 따라 주었다.

"뜬금없는 이야기 아니니까 들어봐.”
“.....”
“그니까, 내가 데뷔하기 3년 전 이야기인데 말이야."
 
 
지원은 조금 아프다는 듯, 이야기를 덤덤하게 시작했다. 비아이는 그런 지원을 무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눈치 없이 터진 딸꾹질을 빌미로 다리를 앞으로 쭉 뻗어, 자세를 바로 잡았다.

"사장이 한빈이랑 내가 동시에 데뷔할 수 없다고, 우리 보고 한명은 포기하라 했어. 처음에는 지 일 아니라고 막말한다고 엄청 욕했지. 근데 나중에서야 그때 돈이 없어서 그랬다는걸 서류 더미에서 본거야. 어쨌든, 처음에 그래서 그 말 들었을 때 나는 당연히 한빈이가 데뷔할 줄 알았어. 나도 그걸 바라는 것 같았고. 간절했던건 마찬가지였지만 그 정도는 달랐거든. 뭐, 다른 사람들은 몰랐겠지만 그래도 어떻게 내가 그걸 모르겠냐. 그래서 바로 너가 데뷔할거지? 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걔가 그러더라. 형이 데뷔하라고. 그런데 웃긴 건 거기에서 아냐 너가 데뷔 해 너가 나보다 더 열심히 연습 했잖아 이 말이 안 나오는거야."
 
 
비아이는 꿀꺽,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듣고 있다는걸 표현했다. 그러자 지원이 작게 미소 지으며 말을 잇는다. 그래서 결국에는 내가 데뷔했는데, 진짜 데뷔하고 나서야 내가 얼마나 미친놈이었는지 알겠더라. 울면서 찾아갔어. 가서 미안하다고 미치겠다고 연예인 안 하겠다고 차라리 나를 죽여달라고 별의 별 지랄을 다 했는데 걔가 들어주다가 도저히 안되겠는지 딱 정색하고 말하더라. 너는 그럴 말 할 자격 없다고. 포기가 얼마나 힘든지 모르는 사람한테서 듣고 싶지 않다고.

"..."
 
 
비아이는 생각했다. 내게 지금 이 이야기를 해주는 이유는 뭘까. 조금은 알 것 같지만서도 확신할 수 없는게 분명 지원은 저에 대해 알고 있는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컴퓨터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원에게 빌려주지 않았다. 혹시 지원이 바깥 세상이랑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면 바로 다시 원래 있던 세계로 돌아가게 될까봐.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비아이는 최대한 처음 지원에게 주어진 환경 밖으로는 그를 분리시키기 위해서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는거다.

"너는 사람들이 왜 예술을 하는거라고 생각해?"
"..."
"나는 예술하는 사람들은 전부 자기가 그걸 좋아하고 잘 하니까 편하게 살자는 의미에서 하는거라고 생각했어. 머리 쓰기는 싫고 직업은 가져야겠고. 내가 그랬거든."
"..."
"그런데 걔가 그러더라. 세상이 자기가 원하는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 예술을 한대."
 
 
황홀하게 펼쳐지는 색깔들. 무수히 떨어지는 별 빛. 화려하지만 그래서 구슬픈 사랑. 세상에 아름다운 건 정말로 많지만, 그걸 경험하는 사람은 드물고 자각하는 사람은 더더욱 드물다. 좋은 날 보다 힘든 날이 많듯, 보고 싶은것 보다 보고 싶지 않은 걸 보는 경우가 더 많을 거다. 그런 현실에 적응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너처럼, 그리고 나처럼 벗어나려는 사람들도 있지."
 
 
지원이 눈이 반짝 빛이 났다. 비아이는, 그 눈을 바라보다가 은근슬쩍 눈을 돌려 옆에 있는 화분을 바라 보았다. 눈에서 별이 쏟아질 것만 같아.
 
 
"보고 싶은걸 보기 위해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 듣고 싶은 노래를 듣기 위해서 노래를 만드는 사람들부터 해서 듣고 싶은 노래로 플레이 리스트를 채우는 사람들도 해당 돼 이거는. 세상이 하는 말은 쓴 말의 비율이 월등히 높으니까. 너가 예술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이거는 무조건적으로 암기 해야만 해. 이것도 모르고 계속 달리다 보면 언젠가는 지쳐서 쓰러질 때가 올거니까. 내가 왜 이 일을 하는거지. 그 누구도 날 좋아하지 않는것만 같은 기분이 들 때. 그때는 꼭 멈춰서 뒤를 돌아봐.
너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분명 너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거야. 그리고 그거는 사실, 별 이유 없는 미움이 대부분이고. 그럼에도 상처받고 등 돌리는건 우리 자신이야. 너가 좋아하는 걸 표현했을 때 아, 나는 별로인데. 라고 하는 사람들은 사실 그 고통이 얼마나 큰 지 잘 몰라. 나도 그래서 지금 너한테 이거 쉬운데 왜 못해? 하는거 아니야. 나도 겪어 봤으니까. 이게 얼마나 힘든지 알아. 지금 엄청 마음이 너덜 너덜 할 거고. 어떻게 무엇부터 해야할지도 모를거야. 아님 그냥 이대로 시간이 다 치료해 주겠지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어. 게다가 너는 친구를 위해서 꿈까지 포기했잖아. 십 몇 년을 그것만 보고 살았는데. "
 
 
비아이의 코가 찡하고 울렸다. 울 것 같다고 느낀것은 시야가 자꾸만 흐려진걸 자각 했을 때였다. 지원이 엄지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아주며 말한다. 울어도 돼. 그 말에 비아이는 심장에 구멍이라도 생긴 듯, 아니면 공기가 가득 찬 듯 큰 소리로 울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딸꾹질은 멈춘지 오래였다. 지원은 비아이의 등을 톡톡 토닥여주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도 내가 지금 너한테 이렇게 말하는건 계속 이렇게 지내다가는 정말 터져버리고 마는데 그때는 너 의지로도 어떻게 할 수가 없게 돼 버리기 때문이야. 약은 가뿐하지. 손목을 긋고 또 긋고 벽에도 피 날때까지 머리 박다가 안되겠다 싶어서 자살기도까지 하게 되는거 정말 한순간이야. 난 너가 그때의 나처럼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너가 꿈을 포기한건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포기할 용기가 있어서니까. 그 많은 시간을 쓰레기통에 쳐박을 용기, 한치 앞도 모르는 세상에서 가장 노력 해왔던걸 내팽겨칠 용기. 그러고도 괜찮은 삶을 살 수 있을거라는 자신에 대한 용기."
 
 
딸꾹질이 다시 시작되었다. 비아이는 멈출 노력도 하지 않았다. 아까부터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용기있게 꿈을 접은 그 날만큼, 너는 너 자신만큼은 사랑해야 돼. 여름이 오면 웃으면서 축구하고 비가 오면 번거롭더라도 밖 막걸리 집에서 파전이나 찢어먹고. 원래 그 모습으로 돌아가야 해. 너는 너 모습 그대로도 충분히 아름다웠으니까. 너의 예술을, 더 나은 걸 보기 위한 발걸음을, 너만큼은 미워하면 안 돼."

지원이 생각하기에는 정말로, 비아이의 모습은 어린아이 같았다. 상처를 주고 받는 세상에서 나온 가장 흔한 피해자. 언제나 강한척 하지만 실상은 그러했다. 비아이가 듣는 단어들은 씁쓸하기 그지없어서 초코콘같이 자꾸만 단 것을 찾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지원은 생각했다. 비아이의 마음에 비아이의 목소리가 메아리친다. 잡은 손이 무척이나 따뜻했다.

결국 그날 축구는 하지 못했다. 버릇인듯, 비아이가 저번처럼 울다가 까무룩 잠들었기 때문이다.


*****

"자?"
"아니."
"왜 안자?"
"그냥."
 
 
순식간에 한 달이 지나고 어느새 마지막 날이다. 의미없는 말들이 공백을 채우고 다시 또 무한할 것만 같은 침묵이 계속된다. 난 오늘 사라지는걸까. 그러면 오늘이 지나면 나는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 가는건가. 그것도 아니면 아예 그냥 흔적도 없이 없어질까. 알 수 있는게 하나도 없는 지원은 지금 떨리기 보다는 공포스러운 감정을 심숭생숭한 기분으로 마주하고 있다.

살면서 가장 짧은 한 달이었다. 비아이가 물었다. 형 어렸을 때 꿈이 뭐였어? 뜬금 없는 질문이었지만 새벽에만 감수성이 풍부해지는 비아이를 이제는 알 것도 같아서, 지원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화가. 울 아빠가 화가였거든. 비아이가 느리게 대답한다. 그럼 왜 화가 안 했어? 지원은 잠시 고민하는 듯 하다가 낮은 목소리로 비아이의 귀를 적셨다. 그림 연습 핑계로 신체가 아주 잘 묘사된 만화책 보다가 아빠한테 걸렸어. 아빠가 나 미술 쪽으로 가면 족보에서 긁어서 하늘에 뿌릴거래. 쿡쿡 웃던 비아이가 계속해서 말했다. 형 화가 했으면 좋았을 것 같은데. 나 명화 좋아해. 마네 풀밭 위의 점심식사 같은 거. 어쩌고 저쩌고 중얼거리는 방금 깬 듯한 비아이의 목소리를 듣다가, 지원이 이제 잘 거라는 듯 뒤척거리다 결국에는 등을 보였다.
 
 
"나 졸려. 굿나잇. 이야기는 내일 마저 해주라.”
 
 
내일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뒷 말은 조용히 삼키고 지원은 애써 안 감기는 눈을 감으려 노력했다. 사실 그건,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르는 비아이의 공백을 최소로 줄이기 위한 초라한 몸부림 이었다.
 
사실 거짓말이다. 지원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비아이가 혼자 떠드는 소리를 듣다가 자기도 모르게 잠든게 사실이다.

 조잘 조잘 목 아픈지도 모르고 떠들어대던 비아이는, 사실 형 볼 때 전에 지원이 형 생각 딱 한 번 했어. 진짜 처음에 만났을 때 그때. 지금은 아니지만. 라는 말을 내뱉고 뒤늦게야 아차,하고 그제서야 지원의 얼굴에 시선을 두었다가 바로 멈칫했다. 온몸에 힘이 빠지는 기분이 든다. 진짜.... 허탈함과 동시에 드는 안도감에 비아이가 가슴을 쓸어내린다. 듣고 있었으면 뭐 할뻔 했네. 참. 일찍 자는건 누구를 닮아서. 여튼 그때의 지원과 다른 점이 하나도 없다. 지원의 가슴팍에 걸쳐있는 이불을 다시 목 끝까지 끌어 올려줬다. 포근한 느낌이 거의 머리 끝까지 닿자 지원은 만족 한다는 듯 우움, 표정을 잠시 찡그리고는 아까보다 훨씬 환한 얼굴을 지어보였다. 그래. 형은 오래 건강 해야 돼. 아픈 건 꼴 보기도 싫으니까. 나보다 훨씬, 훨씬 오래 살아서 내 행복까지 가져가 행복해줬으면 한다.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사람이니까. 세상에 김지원보다 제게 가치있는것이 있을까. 대답은 뻔히 '아니'었지만 비아이는 계속 머릿속으로 그 질문을 되풀이 했다. 제게 1순위는 지원이었다. 예전부터 그러했고 내가 죽는 순간까지도 쭉. 비아이는 지원의 코 밑에 손을 대 호흡이 규칙적이라는 생각에 확신을 심고 최대한 조용하게 몸을 일으켰다. 사부작, 천과 천이 닿는 소리가 침대 스프링 소리와 겹쳐 새벽에는 다소 무서울 수 있는 반주가 되었지만 비아이는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어둠이 짙게 가라앉은 방에서 용케도 저가 원하는 것을 찾았다. 손에 꽉 쥐어보자 모퉁이 부분에 눌린 손바닥이 아파온다.

땅에서 솟은건지 하늘에서 떨어진건지 지원은 그 날 제 침대에 예전 그 언제와도 같이 누워있었다. 하필 그 날. 그래, 하필 그 날. 어떤 욕을 먹더라도 다시 한 번 그 얼굴과 목소리를 보고 듣고 싶어서 자살하기로 다짐한 그 날, 지원은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 태연하게 침대에 누워있었다. 마치 저를 말리려는 듯이. 좀 더 살아도 괜찮다고 말해주는듯이. 한빈은 다시 어두운 방을 헤쳐 지원이 자고 있는 침대에 도착했다. 그리고 잠에서 깨지않게 조심스레 지원의 호주머니를 열어 작은 USB를 꽂아주었다. 새로운 인생을 준 지원에게 아직도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는걸 깨달은게 고작 이틀 전이다. 얼굴보고 말하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저번처럼 노래 들려 주겠다는 식으로 낚는 것도 안 통할게 뻔해서 결국 이렇게 알아서 듣든가 말든가 식으로 줄 수 밖에 없는게 미안하다. 그래도 하루 빨리 전해주고 싶었다. 혹시 휙 왔던 것처럼 다시 휙 가버릴까봐. 그러면 제게 남은 것은 미련이라는 이름의 죄책감 뿐일거다. 그 상황이 눈물나게 무서운 비아이는 짧은 데모라도 지원에게 쥐어주지 않고는 못 베기겠었던거다. 아, 내일은 진짜 고맙다고 말로 해야지. 자꾸 노래로만 하고 싶은 말 하니까 그냥은 절대 그런 말 못하는 사람 같잖아. 어느새 지원의 온기에 USB는 따뜻해졌고 그걸 바라보고 있던 비아이의 눈시울도 뜨끈뜨끈해졌다. 조용히 뻗은 손은 다른 무엇도 아닌 지원의 손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그렇게 둘을 실은 밤은 아침을 향해 느리지만 분명한 속도로 달려나갔다.

*****
 
 
아침해가 떠올랐다. 비아이의 까만 동공에 노란 햇살이 녹았고 그는 그제서야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눈을 낮게 깔고나서야 보이는 지원의 얼굴에도 노란색의 빛이 머문다. 그건 마치, 영원과도 같은 따뜻함이어서 비아이는 남몰래 눈을 꾹 꾹 찍어댔다. 그리고 천천히 그 손으로 비아이는 지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에 감기는 검은 머리카락이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삑. 삑. 삑. 비아이의 알람 시계가 아침 6시라고 알려주었다. 비아이는 지원이 깨지 않게 한 손으로 알람 시계를 조용히 끄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계속 그의 머리카락을 부벼댔다.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해 보이는 지원을 비아이는 행복을 가득 담은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

 지원의 몸이 두둥실, 하늘 위로 떠올랐다. 지원은 침대에 제 발이 닿지 않는 것을 알고 바로 창백하게 식어 어떻게든 내려가기 위해 발버둥쳤다. 비아이도 당황해서 벙쩌있다가 급한대로 지원의 바지춤을, 다음에는 입고 있는 셔츠를, 그리고 그 다음에서야 손을 잡아 최대한 지원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당황보다는 경악에 가까운 표정을 한 지원이 어떡하면 좋냐고 허공에 소리쳤다.
 

살면서 날아본 적 이라고는 없는 지원과 사람이 날 수 있는 종족이라는걸 오늘에서야 안 비아이의 표정은 볼 품 없었다. 왜 영원한건 없는걸까. 비아이는 이렇게 또 다시 지원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눈 앞이 깜깜해졌다. 겪었기 때문에 안다. 지원이 없는 세상은 그야말로 지옥이다. 비아이는 두 번이나 그 지옥을 겪을 자신이 없었다.

가지마. 안 돼. 가면 안 돼. 마치 폭풍우 치듯 비아이의 머릿속에는 온통 저 생각 뿐 이었지만 입에서 나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잘 해줄걸. 틱틱 대지 말걸. 싸가지 없게 굴지 말걸. 좀 더.... 좀 더......
고맙다고 말이라도 해줄 걸.
 
 
"있잖아."
"응????"
"나 원래 집에서 라면 안 끓여먹어. 냄새 베니까."
"어????"

그냥 그렇다고. 비아이는 그렇게 말하면서 울긋불긋 웃었다. 솔직하게 이야기 해 줄 수는 없어 시 보다도 축략된 말을 전한다. 사실 그 날. 마법처럼 지원이 제게 온 그 날. 그제서야 저는 예전의 지원을 상기시키던 방 냄새를 미련 없이 라면 냄새로 덮을 수 있었다. 사람은 정말 왜 솔직할 수 없는걸까 하며 비아이는 후회했다. 그러나 지원으로서는 정말 어이가 터지고 방구가 터지고 세상이 터질 지경이었다. 아니 내가 살려주라고 했지 라면 먹고 싶다고 했냐??? 그렇지만 정말로, 비아이는 그 짧은 시간동안 지원이 제게 남은 수많은 상처를 치유해주고 갔다는걸 느낄 수 있었다. 제가 눈 감을 때 까지도 지원 같은 사람이 다시 나타날 일은 없겠지. 비아이는 제가 그동안 지원에게 해준게 별로 없는 것 만 같은 기분이 들어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세상이 환했다. 지원은 너무 갑작스레 쏟아지는 빛에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일단 두 눈을 꾹 감았다. 너무 환해서, 점점 흐러져만 가는 얼굴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지원은 보이지도 않는 곳으로 손을 뻗으며 잡힐 듯 말 듯 투명하게 그를 통과하는 비아이의 손을 움켜쥐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 제발. 제발 이렇게는 갈 수 없어. 시야에 차오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하고 앞으로 다시는 보지 못 할 얼굴을 그리고 또 그렸다. 눈썹, 그 밑에 눈, 그 옆에 귀, 그리고 눈 밑의 입까지 너무나도 선명하게. 절대 잊지 못하도록, 그렇게. 그리고 그 순간 자기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왜 이제야 알았을까. 왜 이제서야 보이는걸까. 비아이는 한빈과도 매우 다른 사람이었다. 더 솔직하고 더 상처받고 몸도 마음도 어린. 그런 사람. 지원은 당장이라도 죽어버리고 싶을만큼의 미안함에 헐떡였다


아직 채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한 비아이가 지원에게만 들릴 만큼의 목소리로 말했다.
 
 
" 형 거기가면 꼭 그 한빈이한테 솔직하게 좋아한다고 말해봐."
"..."
" 그 애가 정말 내가 맞다면, 분명 형 엄청 좋아할걸."
"..."
"뭐, 나 만큼은 아니겠지만."
" 걱정하지 마. 잘 될거야. 지금까지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 쭉. 형의 진심을 표현하면 나라면 절대 거절하지 못할거야. 걔도 그렇고. 걔 나라며. 지금 나도 이렇게 죽을 만큼 사랑하는데, 걔는 뭐 다르겠어?"
"........"

" 행복하라는 거창한 말은 안할게. 형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솔직히 힘든날이 더 많잖아 좋은 날보다. 안 그래? 그런데 그래도 형이랑 함께였던 시간은 정말 좋았다. 정말 평생... 그러고 살고 싶었을 만큼. 그러니까 형도 행복하기 보다는 하루 하루 살 맛나기를 바랄게."
 
 
이건 진심이야! 비아이가 그제야 살짝 웃으며 지원을 바라보았다.

지원은 말해주고 싶었다. 아니라고, 너는 그 애랑 같지 않다고. 저는 비아이가 저를 볼 때 전에 그 지원을 떠올린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정말 말도 안되게 화가 났으면서, 지금 이렇게 비아이는 이렇게 무덤덤한 모습이다. 심지어 그 곳의 자기 자신을 만나면 고백하라고까지 말한다. 정말 내가 그런 놈으로 밖에는 안 비치는 건가. 답답하고, 미쳐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뭔가 한 마디 말을 하고 싶은데, 그 말이 무엇이었는지 도저히 모르겠어서 더 미칠 지경이다. 정신이 아득해져만 간다.

 "비아이!"
 
 
이렇게 갈 수는 없다는 듯 지원이 마지막으로 비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제발. 제발, 닿기를.
비아이는 놀랍다는듯 움찔 했다가, 울고 있으면서도 활짝 웃어 말했다.

"이름. 처음으로 불러줬어."


그리고 암흑이었다.
 

****

최근들어 맞이 하는 가장 서늘한 아침이었다. 창문을 닫고 자는 것을 깜빡했는지 겨울 바람이 코를 간지럽힌다. 덮고 있는 이불마저 차갑게 얼어버린 것 같다. 몸을 뒤틀자 이불이 부딫히면서 생기는 부스럭 소리가 마치 얼음장 같다고 비아이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 순간에 비아이는 눈을 뜨지 않고도 체감할 수 있었다. 제가 잠든 사이 정말로 많은게 변했다는 것을. 계절도, 그리고 지원도. 비아이는 조심스레 눈을 떴다. 아직 흐릿한 시야에 제 방 천장이 잡혔다. 천천히, 옆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첫번째로 시야에 잡힌건 이불, 그리고 또 이불, 마지막에도 역시 이불이다. 지원은 없었다. 처음부터 없었다는듯이 그렇게 흔적도 없이. 비아이는 다시 눈을 감았다. 좀 더 긴 꿈을 꾸고 싶다 생각했다.
 
 
*****

" 허억!"
 
 
넓은 병실에 지원의 목소리가 울렸다. 뭐지. 지원은 최대한 제게 일어난 일을 기억하려 애썼다. 누군가랑,아주 오랜 시간을 함께 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누구였지. 얼굴도 목소리도 지워진 듯 기억 나지 않는다. 꿈이었나, 생각하며 옆으로 베고 자서 뻐근거리는 고개를 든 지원은 진심으로, 세상이 끝난다는 소리를 들은 느낌이었다. 지원은 앞의 싸늘하게 식은 한빈의 손을 잡고 자고 있었다.

삐하고 뻔한 소리가 연기처럼 방안을 메웠다. 그 소리에 언젠가부터 곁에 있었던 의사 간호사들이 한빈의 얼굴에 흰색 천을 끝까지 덮어주었다. 병실안이 소란스럽다. 죄송합니다. 라는 말과 함께 지원의 몸을 어린 아이처럼 일으켜 세운다. 지원은 정신없이 바뀌는 세상에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멍하니 한빈이 누워있는 침대를 바라보았다.
 
 
땅에 닿은 발바닥이 차갑다. 앞을 가리는 눈물이 방울 방울 떨어져 지원의 발바닥에 닿았고 지원은 반사적으로 제 발바닥을 보았다. 한쪽만 양말이 신겨져 있었고 한 쪽은 맨발이었다. 지원은 그제서야 무작정 병원으로 뛰어왔던 기억이 흐리게 났다.
 
 
혹시 죽은 듯이 자고 있는게 그 반대일까, 지원은 먹먹해져 가는 귀 끝에서 한빈의 숨 소리를 잡아내기 위해서 몸을 앞으로 뻗었다. 야 너 왜 그렇게 누워있어. 그리고 거기 사람들은 왜 얘 얼굴에 그따구로 천을 덮어요. 그러니까 죽은 애 같잖아. 안 그래도 여기 병원이어서 기분 이상한데. 또 아까 손은 왜 그렇게 차가워서 사람 기분 이상하게 만들어. 아직 안 죽었지. 죽은 거 아니지. 김한빈. 야. 김한빈. 김한빈. 손이, 너 손이 너무 차가워. 응? 하나도 안 따뜻해 원래 따뜻한 놈이. 야. 너 왜 그래. 괜찮아? 김한빈. 김한빈. 김한빈.

"김한빈!!!!!!"

아. 얼마나 아름다운 죽음인가. 벽에 걸려있는 시계는 9시 14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5월 2일 9시 14분 이었다.


*****
 
 
김한빈이 죽고 몇 일 뒤, 지원은 호주머니를 뒤적거리다가 USB를 발견했다. 보자마자 뭔지 알아챈 그는 바로 집으로 뛰어간다. 우당탕탕 문을 열고 들어가 컴퓨터 의자에 앉았다. 다행히도, 지원의 컴퓨터는 생각보다 금방 켜졌다. 지원은 전원이 들어오자마자 USB를 컴퓨터에 꽂고 작은 눈을 크게 부릅 떠 창이 뜰 때 까지 인내했다. 그러면서도 지원은 제게 비아이가 마지막으로 남긴게 무엇일까 하고 걱정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이건, 불공평하다. 나는 마지막에 할 말도 제대로 못 했는데. 생각해보면 정작 시간을 알고 언제 떠나야만 하는지 알고 있었던건 나였는데 나는 아무것도 해준게 없다.

형. 형. 지원이 형..
 
 
"김지원.”
 
 
귀에 환각이 들려오는 듯 했다. 이제 정말 미쳐가나. 더 이상 제게는 한빈도 그 때 그도 더 이상 남은게 없어서 그런가. 아까부터 미친듯이 흔들리는 손이 수긍하듯 위아래로 떨려왔다. 지원은 컴퓨터에 뜨는 창을 승인하고 나서야 그 사람이 제게 남긴게 녹음 파일 아리는 것을 깨달았다. 34초. 생각보다 길지 않은 재생바를 보고 지원은 생각했다. 짧은 작별인사인가.
 
 
딸깍.
 
길고 긴 시간을 넘어온 파일이 마침내 재생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드럼소리가 지원의 귀를 타고 들어왔다. 그리고 목소리. 너무나도 그리웠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 넘쳤을 때,

내 이름을 기억해줘

지원은 웃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도 그리웠던 목소리를 들었는데도 정신없이 눈물이 났다. 살면서 이렇게 많이 운 날이 있었나. 이리도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던 적이 있었나.

스쳐가는 마주침이라도
 
우연같은 필연으로
 
서성이던 나였기에
 
내 이름을 기억해줘
 
내 이름을 기억해줘


죽을 때 까지도 잊지 못할 노래가 세상을 울렸다. 지원은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어린 아이처럼 엉엉 계속 울어댔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름이, 그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서였다.




*****

번외



: 혼돈의 USB

삼 년 전에, 지원은 뽕을 빨아본 적이 있다. 좀 알고 지내던 형이 너도 좀 할래? 하고 건네는걸 냉큼 네 라고 대답하며 두 손으로 받았다. 안 궁금했다면 거짓말이겠지. 중독될까 하는 걱정보다는 호기심이 월등하게 앞서던 나이, 지원은 손에 있는 대마초인지 위드인지 뭔지를 빨고 바로 덜덜덜 떨리는 손으로 쓰러졌다. 아, 세상이 빙빙 돈다. 빙빙 돌아서 돌고 돌아가는구나... 제정신이 아닌 지원이 내뱉는 말에 뽕을 줬던 형은 어우 미친 얘 완전 갔네. 하고 소름 돋는다는듯이 손으로 양 팔을 비비고 방을 나갔다. 혼자 남은 지원의 시야에는 정말 그 어느때보다도 떨려오는 손이 들어왔다. 저기 지나가는 여자들은 전지현 누나보다도 이쁘네.. 대쉬하면 먹힐까. 이런 헛소리나 지껄이면서.


그리고 지금, 지원은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떨려오는 제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용을 가늠할 수 없는 USB. 대체 비아이가 제게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었던 말은 무엇일까. 창에 동영상 파일이 뜬다. 아직 아무것도 재생 된 게 없는데도 그걸 보니 갑자기 코 끝이 찡해오고 얼굴이 뜨거워진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동시에 맑아지는 것 만 같다. 자꾸만 눈시울이 붉어지려는 걸 억지로 참는다. 내가 후회의 끝자락에 너를 안고 있었으면 뭐가 달라졌을까. 지금 이렇게 생각 한다고 바뀌는건 없다는걸 알고 있음에도 지원은 그 순간을 떠올리지 않고는 숨을 쉴 수 없었다. 몇 일 동안 악몽처럼 제게 달라붙었던 건 그의 얼굴도, 말도, 행동도 아니었다. 바로 나 자신. 지원은 숨이 턱 막혀오는 기분에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어째 하루라도 괜찮은 날이 없다. 주변에서는 별로 크게 낙담하지 않아보이는 지원에게 그래도 극복이 빠르다며 칭찬해주었다. 사내새끼가 이런거에 질질 짜면 안돼! 지원은 귀를 막았다. 당장이라도 방금 들었던 말 때문에 귀에서 구정물이 나올 것 같다. 대체 왜 사람들은 그게 칭찬이 아니라는걸 모르는걸 괜찮아 보인다고 괜찮은게 아닌데. 지원은 남들에게 괜찮아 보이기도 싫었다. 무대 위에서 웃으면서 위로해줘서 고맙다고, 그 친구도 이제 보내줘야 겠다고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것도. 그렇다고 힘든걸 티낸다 해도 뭐가 달라지는건 아니다. 오히려 프로답지 못하다고 욕이나 처 먹겠지. 지원은 흐릿해져가는 초점을 바로 잡고 컴퓨터 화면을 다시 바라보았다. 무슨 내용을 들어야 내가 만족할까. 무슨 내용을 들어야 마지막 순간까지 아무말도 하지 못했던걸 하루라도 안 후회 할 수 있을까. 지원이 플레이버튼을 클릭했다.


지원은 눈을 크게 떴다가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떴다가, 또 감았다. 내가 지금 뭘 본거지. 아니 보는거지. 그 어떤 파일도 이보다 충격적일 수는 없을거다. 그 어떤 말도 이보다 놀랍지는 않을거다. 지원은 천천히 컴퓨터의 볼륨을 낮췄다.
 
 
 
재생된 1시간 짜리의 야동은, 호기심에 빨아봤던 뽕보다 더 달콤했다.



*
 
 
"어???"
 
 
뭐지. 저게 왜 여기있지. 비아이는 지금 인생 최대의 혼란을 몸소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아무나 좋으니까 지금 내 앞에 저게 설마 제발 지원의 호주머니에 있어야 하는 USB가 아니라고 말해줘. 하지만 정말 아무리 봐도 그 광택은 그 때 심사숙고 해서 고른 그 검정색 USB만이 낼 수 있는 광택이라서, 비아이는 아프게 무릎을 땅에 찧었다.


외전


 
: 사실은


지원이 죽고 나서 비아이는 죽기를 결심했다. 실제로 죽기 직전까지 갔었다. 지상과 이별하기 직전, 비아이는 그리워서 죽을 것만 같았던 얼굴을 참말로 오랜만에 봤다. 비아이는 당장 손을 뻗어 그 눈가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말했다.
한 달을 줄게. 대가는 뭔지 알거라고 생각해.
바아이는 정신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도 좋으니 제발 다시 그를 볼 수 있게 해주세요. 정말 뭐라도 좋으니. 제발. 제발.
 
차라리 제 목숨이라도 가져가 주세요.
 
 
정신을 차려보자 집 앞이었다. 얼굴은 건조했는데 손에는 물이 가득했다. 비아이는 조용히 제 집 문을 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
 
: 그리고



새벽이 깊게 물들었다. 부스럭 거리는 걸 보니 지원은 한참 꿈나라다. 늦은 시간까지 자지 않고 있었던 비아이가 지원의 귀에 속삭였다.
 
"20일."



 
 
 
 
 
 
 
 
 
 
 
 
 
 
 
 
 


_____글에서 잘 소개 되지 않아서 구질구질하게 하는 설명
 
 
 
* 비아이랑 한빈은 다른 인물
* 한빈이 있었던 세계에서 지원은 유명 연예인, 비아이가 있었던 세계에서 지원은 그냥 연예인
* 한빈이랑 있던 지원이 비아이가 있는 세계에서 지원이 죽고 난 후 그 세계로 가게 된 것! 그리고 다시 한빈이 있는 세계로 돌아온 것! 한빈은 지원이 차원이동 한 날에 죽기 일보 직전이였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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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중편 팬픽입니다. 휴. 정말 쌩고생을 했어요! 끝까지 읽어주셔서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응원해주신 랠시님 베리 땡큐! 밥빈러들 꼭 건강하십시오. 그리고 바비 비아이!!! 건강해줘요 그래서 건강하게 사랑해줘요.